서로를 잊지 못한 2년의 끝
열여덟의 여름부터 스물다섯의 겨울까지. 당신의 모든 계절이었던 그 사람을 기억하나요?
에피소드
서로를 잊지 못한 2년의 끝 — 작품 소개
열여덟의 여름부터 스물다섯의 겨울까지. 당신의 모든 계절이었던 그 사람을 기억하나요?
#로맨스 #겨울 #회상 · 10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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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스물다섯의 겨울, 열여덟의 여름
코끝이 시려울 만큼 차가운 바람이 불면, 그 이름이 떠오른다.
스물다섯의 겨울. 코끝이 시려울 만큼 차가운 바람이 불면, 나는 어김없이 하나의 이름을 떠올린다.
홍채은. 내 열여덟의 여름부터 스물셋의 겨울까지, 나의 모든 계절이었던 사람.
'올해 첫눈이 온대. 옷 따뜻하게 입고 나가, 태석아.'
이제는 오지 않는 너의 다정한 메시지 대신, 건조한 날씨 앱의 알림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2년. 나는 아직도 네가 없는 겨울이 낯설고 시리다.
우리의 시작은 열여덟 살, 여름 햇살이 쏟아지던 고등학교 체육대회였다.
"김태석! 파이팅!! 한 점만 더 내면 결승이야!"
나는 반 대표로 배드민턴 단식 경기에 출전했고, 손에 쥔 라켓이 부서져라 코트 위를 뛰어다녔다.
"와아아악! 김태석 이겼다!!"
스매시가 코트에 꽂히고 우승이 확정되던 순간, 땀에 젖은 채 고개를 든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스탠드 맨 앞줄에서 나보다 더 기뻐하며 방방 뛰고 있던, 홍채은.
'그때 너의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심장이 셔틀콕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오후에는 채은이가 계주 마지막 주자로 트랙에 섰다.
"홍채은! 앞만 보고 달려! 뒤돌아보지 마!" 나는 목이 터져라 응원석에서 소리쳤다.
채은이는 1등으로 결승선 테이프를 끊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를 향해 브이를 그려 보였다.
"김태석! 나 달리는 거 봤어? 나 완전 빨랐지!"
"어, 봤어. 완전 날아다니더라. 다친 데는 없고?"
우리는 서로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목격했고, 그날의 열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잡았다.
"채은아, 우리... 앞으로도 계속 같이 뛰자. 체육대회 말고, 그냥 계속."
스물다섯의 태석은 차가운 방 안에서 그날의 온기를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의 우리는, 이렇게 멀어질 줄 꿈에도 몰랐는데.'
에피소드 2: 기다림이라는 이름의 편지
고된 군 생활의 유일한 빛이었던 너의 편지.
스물한 살. 내가 군대에 입대하던 날, 논산 훈련소 앞.
"채은아, 나 진짜 금방 다녀올게. 울지 마, 응?"
"누가 운대? 나 안 울어. 너나 훈련받다가 내 생각난다고 울지 마."
채은이는 애써 씩씩하게 웃었지만, 내 손을 꽉 잡은 그 작은 두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군대에 있던 1년 6개월. 채은이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인터넷 편지와 손 편지를 보내주었다.
'태석아, 오늘 서울엔 첫눈이 왔어. 네가 있는 강원도엔 눈이 더 많이 오겠지? 제설 작업하느라 힘들겠다.'
'나는 오늘 학교 도서관에서 밤새울 예정이야. 네가 지켜주는 나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게. 사랑해.'
고된 훈련이 끝나고 점호 시간마다 채은이의 편지를 읽는 것이, 내 군 생활의 유일한 빛이고 숨구멍이었다.
"홍채은... 진짜 예쁜 짓만 골라서 해."
나는 관물대 안쪽에 붙여둔 채은이의 사진을 보며 혼자 실없는 웃음을 흘리곤 했다.
주말이면 채은이는 왕복 6시간이 걸리는 버스를 타고, 한 손엔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가득 든 채 면회를 왔다.
"태석아! 나 왔어!"
"비도 오는데 뭐 하러 무리해서 왔어. 피곤하겠다, 우리 채은이."
"네 얼굴 한 시간이라도 더 보려고 왔지. 밥은 먹었어? 살 빠진 것 같아."
나는 채은이의 손을 잡으며 수백 번 다짐했다. 이 여자를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채은아, 나 전역하면 진짜 너한테 최고로 잘할게. 나 기다려준 시간 절대 후회 안 하게 할게."
"당연하지. 너 전역하면 나 매일매일 업고 다녀야 해. 알겠지?"
스물두 살의 봄. 나는 마침내 전역했고,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태석아, 전역 축하해! 고생 많았어 내 사랑!"
"기다려줘서 고마워, 홍채은. 이제 진짜 꽃길만 걷자 우리." 가장 빛나고 애틋했던 우리의 시간이었다.
에피소드 3: 스물셋, 현실의 무게
사랑만으로는 버티기 힘들었던 차가운 현실.
우리의 이별은 스물셋의 늦가을에 찾아왔다.
바람을 피우거나, 누군가 큰 잘못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스물셋이라는 나이가 주는 현실의 무게가 우리를 짓눌렀을 뿐이다.
"스물셋의 현실은 우리의 사랑만으로 버티기엔 너무 무겁고 벅찼다."
"태석아, 오늘 저녁은 그냥 삼각김밥 먹으려고. 자격증 시험이 당장 다음 주라 밥 먹을 시간도 없네."
"어... 그래. 나도 오늘 전공 과제 때문에 밤새워야 할 것 같아. 주말에 얼굴 볼 수 있을까?"
"주말에도 나 스터디 있어... 미안해, 태석아. 시험 끝나고 내가 맛있는 거 살게."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 내어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잃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데이트 날에도, 우리는 지친 얼굴로 카페에 마주 앉아 각자의 노트북만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채은아, 피곤하면 오늘 그냥 일찍 들어가서 쉴래? 너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어."
"아니야... 너 모처럼 시간 냈는데 어떻게 그래. 근데 나 진짜 너무 졸리긴 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손을 잡는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말없이 걸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닌데, 너의 지친 얼굴을 보는 게 내게도 상처가 되기 시작했다.'
채은이의 마음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나의 부담이 되기 싫어 홀로 끙끙 앓던 너의 작은 어깨.
"태석아."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채은이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불렀다.
"우리... 지금 너무 지쳐있는 것 같아."
"채은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너한테 맨날 피곤한 모습만 보여주고, 징징대는 것도 이제 너무 미안해. 네가 싫어진 게 절대 아닌데... 나 자신이 너무 미워져."
"태석아. 우리... 여기까지 할까?"
나는 채은이를 붙잡지 못했다. 그 애를 안아주기엔, 나 역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가장 가슴 아픈 고개 끄덕임이었다.
에피소드 4: 너 없이 걷는 거리
함께 걷던 길을 이제는 홀로 걷는다.
다시 스물다섯의 겨울. 금요일 퇴근길.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연인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
"하아..." 나는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코트 깃을 여몄다.
이 거리는 스물두 살의 겨울, 전역 후 첫 크리스마스를 채은이와 함께 보냈던 바로 그 거리다.
'여기 모퉁이에 있던 붕어빵 포장마차, 아직도 있네.'
'호오 불어먹던 네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선명한데.'
"태석아! 붕어빵은 슈크림이지! 넌 왜 맨날 팥만 먹어? 아재 입맛이야 진짜!"
"근본은 팥이거든? 너 슈크림 먹다가 혓바닥 데지나 마라."
기억 속 채은이의 환한 웃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붕어빵 노점상 앞에 멈춰 섰다.
"사장님, 팥 세 개랑 슈크림 세 개 포장해 주세요."
무의식적으로 네가 좋아하던 슈크림을 시켜버렸다.
'나 혼자 먹을 건데 슈크림을 왜 샀지. 넌 이제 여기 없는데.'
나는 발걸음을 옮겨, 우리가 자주 가던 골목 안쪽의 작은 카페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어? 오랜만에 오셨네요."
카페 사장님이 나를 알아보셨다. 항상 둘이 오던 손님이 혼자 오니 의아한 표정이셨다.
"네, 근처 지날 일이 있어서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드립니다."
'나는 아직도 습관처럼 네 자리를 비워두고 앉아, 채은아.'
우리가 앉아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험공부를 하던 그 자리.
머그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내 마음의 지독한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홍채은... 넌 이맘때면 코끝이 빨개져서 춥다고 찡찡거렸는데. 지금은 안 춥게 잘 지내고 있으려나."
에피소드 5: 채은의 멈춰진 시간
헤어진 지 2년, 여전히 일상 곳곳에 남아있는 너.
스물다섯. 직장인 1년 차가 된 홍채은의 겨울도 다르지 않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루가 길고 지치네.'
'하루 종일 모니터만 봤더니 눈이 다 뻑뻑하네.'
채은은 습관처럼 코트 주머니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우연히 랜덤 재생된 플레이리스트에서,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스물한 살, 태석이가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내게 이어폰 한쪽을 나눠주며 들려주던 그 노래.
"채은아, 나 군대에서 이 노래 들을 때마다 네 생각나서 울 뻔했어."
"어유, 주책이야 김태석. 근데 노래 진짜 좋다. 가사가 꼭 우리 얘기 같네."
채은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다음 곡으로 넘기려다, 결국 그 화면에 멈춰 섰다.
'김태석... 진짜 나쁜 놈. 왜 하필 이런 노래를 알려줘서 지울 수도 없게 만들어.'
채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헤어진 지 2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일상의 아주 작은 파편 속에서 태석이가 튀어나왔.
'어...? 저 넓은 어깨, 익숙한 저 걸음걸이...'
저기 앞서 걸어가는 넓은 어깨, 검은색 코트를 입은 남자.
채은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석아...?"
나도 모르게 작게 입술을 달싹이며 한 걸음 다가갔다. 뒷모습이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남자가 누군가의 전화를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전혀 모르는 타인이었다.
'아... 역시 아니구나. 내가 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거지.'
"하아... 홍채은, 진짜 청승맞다."
채은은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김태석. 넌 내 생각 같은 건 안 하고 잘 살고 있지? 나 혼자만 이렇게 널 거리에 두고 걷고 있는 거지.'
에피소드 6: 서랍 속의 흔적
차마 버리지 못한 기억의 상자.
일요일 오후. 채은은 모처럼 집안 대청소를 시작했다.
"겨울옷 꺼내고, 안 입는 옷들은 좀 버려야겠다."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내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고 있었구나.'
"어? 이게 왜 아직도 여깄지..."
상자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채은은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태석과 6년을 만나며 주고받았던 편지들, 같이 본 영화 티켓, 그리고 군대에서 태석이 보내준 군번줄.
채은은 상자 앞에 주저앉아 멍하니 그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버렸어야 했는데...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여기 쑤셔 박아뒀었지."
편지 봉투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홍채은에게'라는 태석의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스물두 살, 태석이 전역하기 직전에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채은아. 나 이제 진짜 며칠 안 남았다. 그동안 내 옆에서 기다려주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
'너는 내 20대의 시작이고, 전부야.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절대 네 손 안 놓을게.'
'내가 더 멋진 남자가 돼서, 평생 네 옆에서 지켜줄게. 사랑해 채은아.'
채은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후둑후둑 떨어져 편지지에 얼룩을 만들었다.
"거짓말쟁이... 평생 내 손 안 놓겠다며... 왜 이렇게 허무하게 놔버렸어."
"서로 힘들 땐 좀 기대면 되는데, 우리는 왜 서로를 위해준다는 핑계로 밀어내기만 했을까."
채은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오열했다.
배드민턴 라켓을 든 태석과 브이를 하고 있는 채은. 열여덟의 우리는 티 없이 맑게 웃고 있었다.
"태석아... 나침반 고장 난 것처럼 아직도 난 네 주위만 맴돌고 있어."
스물다섯의 채은은, 결국 그 상자를 버리지 못한 채 다시 옷장 가장 깊은 곳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너를 완벽히 덜어낼 용기가, 아직은 없었다.
에피소드 7: 보내지 못한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한 초조한 새벽.
다시 태석의 방. 새벽 2시.
나는 침대에 누워 수백 번도 더 들여다본 채은이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새로고침하고 있었다.
프로필 사진은 기본 이미지. 상태 메시지도 비어있다.
"넌 어떻게 지내는 걸까. 좋은 사람은 만났나."
헤어진 지 2년. 그동안 채은이는 내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설픈 미련으로 연락하기엔, 우리의 끝은 너무나 지치고 무거웠으니까.
하지만 오늘 밤은 유독 네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나는 떨리는 엄지손가락으로 글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채은아, 자?'
아니야, 새벽 2시에 '자?'는 너무 찌질하잖아. 미련 못 버린 전 남친의 전형이지.
'잘 지내? 날씨가 많이 춥다.'
이것도 너무 상투적이야. 답장할 가치도 못 느끼겠지.
'수많은 진심이 활자가 되었다가 다시 허공으로 흩어졌다.'
'채은아. 아까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 앞을 지나갔어. 네가 좋아하던 슈크림 붕어빵도 샀는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더라.'
'난 아직도 네가 보고 싶어. 진짜 많이 후회하고 있어. 우리 다시 만나면 안 될까.'
내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긴 문장이 완성되었다. 전송 버튼만 누르면 된다.
'이 짧은 전송 버튼 하나를 누를 용기가, 지금의 내게는 없다.'
'아니야. 내 이기적인 감정으로 잘 살고 있는 애를 흔들 순 없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결국 입력창은 다시 텅 비어버렸다. 나는 휴대폰을 엎어두고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용기가 없는 나의 새벽이 또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에피소드 8: 각자의 궤도 속에서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길을 걷는 두 사람.
12월의 중순. 일상은 잔인할 만큼 평범하게 흘러갔다.
스물다섯의 겨울, 우리는 각자의 현실을 버텨내느라 여전히 숨이 찼다.
태석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점심시간도 거른 채 커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채은 역시 밀려드는 회의 일정에 치여 퇴근 시간이 훌쩍 넘어서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태석 씨, 오늘 진짜 고생 많았어. 주말 푹 쉬어요."
"네, 팀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태석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회사 로비를 나섰다.
비슷한 시각, 채은도 피곤한 발걸음을 이끌고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올겨울은 왜 이렇게 시린 걸까. 네가 곁에 없어서일까.'
"아, 춥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태석은 지하철역 대신, 무작정 걷고 싶은 마음에 집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채은은 환승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버스 대신 익숙한 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들이 향한 곳은, 두 사람이 가장 많이 걷고 사랑을 속삭였던 고등학교 근처의 그 옛날 골목길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찾아온 이 길 끝에, 누가 서 있을지는 꿈에도 모른 채.
태석은 골목 위쪽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고, 채은은 골목 아래쪽에서 위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서로가 이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오직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 걷고 있었다.
"어...?"
하늘에서 무언가 차갑고 부드러운 것이 태석의 코끝에, 그리고 채은의 뺨에 떨어졌다.
첫눈이었다. 올해 겨울의, 첫눈. 두 사람은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에피소드 9: 우리가 마주친 기적
10미터의 거리, 거짓말 같은 재회.
눈발은 순식간에 굵어졌다. 어두웠던 골목길이 조금씩 하얗게 덮여갔가.
'첫눈이네... 채은이는 눈 오는 날 진짜 좋아했는데.'
태석은 내리는 눈을 손바닥으로 받아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채은 역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태석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태석아. 넌 지금 어디서 이 눈을 보고 있을까.'
그때, 태석이 고개를 숙이고 다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채은 역시 멍하니 앞을 향해 걸었다.
골목의 중간 지점, 작은 가로등이 비추는 교차로.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너와 나만 남은 것 같았다.
우연처럼, 혹은 거짓말 같은 운명처럼. 두 사람은 10미터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발견했다.
태석의 걸음이 돌부리에 걸린 듯 우뚝 멈췄다.
"홍... 채은...?"
채은의 커다란 눈이 더 크게 확장되며, 놀람과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교차했다.
'설마... 진짜 김태석이야?' / '진짜 홍채은이야?'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2년이라는 공백이 무색할 만큼, 서로를 향한 갈망과 그리움이 한순간에 눈빛으로 얽혀 들었다.
태석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내가 그리움에 미쳐 마침내 헛것을 보는 건가.
하지만 눈앞에 선 여자는 분명히, 코끝이 빨갛게 언 나의 열여덟, 그리고 나의 스물셋이었다.
채은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태석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고, 눈 쌓인 바닥을 밟으며 채은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이번에는 절대, 너를 그냥 지나쳐 가지 않을 거다.'
에피소드 10: 엔딩: 스물다섯, 다시 우리의 겨울
마침내 마주 앉아 건네는 안부.
뽀드득, 뽀드득. 태석의 구두가 눈을 밟는 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채웠다.
채은은 다가오는 태석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도망칠 수 없었다.
한 걸음씩 다가오는 태석의 발소리가 채은의 심장을 터질 듯이 두드렸다.
마침내 태석이 채은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가까이서 본 태석의 얼굴은 2년 전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워져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 다정하고 아련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태석 역시 채은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조금 야윈 뺨, 그리고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매.
"김태석..." 채은의 떨리는 입술 사이로 젖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포근하고 따뜻한 가로등 불빛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태석은 손을 뻗어 채은의 어깨 위에 쌓인 눈을 조심스럽게 털어주었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채은아."
"왜... 왜 네가 여깄어... 나 진짜 꿈꾸는 것 같아."
"꿈 아니야. 나도, 이 길이 너무 걷고 싶어서 왔어. 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기대 하면서."
채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참으려 했던 눈물이 기어코 코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울지 마. 여전히 넌 추우면 코끝부터 빨개지네. 감기 걸리겠다."
태석은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채은의 목에 따뜻하게 감아주었다.
태석의 온기가 담긴 목도리가 채은을 감싸 안았다.
2년 동안 서로를 짓누르던 그리움과 후회조차 필요 없는 완벽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태석은 채은의 두 눈을 조용히, 그리고 깊게 마주 보았다.
수백 번을 썼다 지웠던, 그토록 묻고 싶었던 그 평범한 한마디를 마침내 입 밖으로 꺼냈다.
"채은아 오랜만이야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