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소한 시차
에피소드
우리의 사소한 시차 — 작품 소개
앉고 싶은 그녀와 서 있고 싶은 그, 고작 5분의 차이.
#로맨스 #현대극 #시차 · 10개 에피소드
장면 연출과 함께 읽으려면 위의 에피소드를 선택하세요. 아래에서는 각 회차의 본문을 펼쳐 연속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로그인 없이 제공되며, 펼쳐 읽기에서는 보관함의 읽기 위치가 갱신되지 않습니다.
에피소드 1: 지하철 빈자리의 간극
앉고 싶은 그녀와 서 있고 싶은 그, 고작 5분의 차이.
"시민아, 우리 오늘 2호선 타지 말고 버스 타고 갈까?"
"버스? 지금 퇴근 시간이라 엄청 막힐 텐데. 지하철이 훨씬 빠르잖아, 현희야."
스물셋에 만나 어느덧 스물다섯. 2년을 만난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 그리고 너무 다르게 살아왔다.
"지하철은 사람 너무 많아서 치이잖아. 나 오늘 구두 신어서 다리 아프단 말이야."
"세 정거장만 가면 되는데 금방이야. 내가 앞에 서서 막아줄게. 타자."
"아... 진짜 사람 많다. 숨 막혀."
현희는 내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리며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기 끝에 사람 곧 내릴 것 같지 않아? 가방 챙기는데?"
"현희야, 어차피 두 정거장 남았어. 그냥 여기 기대서 서서 가자. 저기까지 비집고 가기 힘들어."
"아니야, 나 다리 진짜 아파. 잠깐이라도 앉고 싶어. 비켜주세요, 잠시만요!"
현희는 굳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기어코 그 빈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시민아, 이리 와! 내 앞에 서 있어."
'고작 5분 남짓. 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굳이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자리를 쟁취하는 게 피곤하다.'
"어휴, 살 것 같다. 넌 다리 안 아파? 아까부터 계속 걸어 다녔잖아."
"난 괜찮아. 평소에도 지하철에서는 웬만하면 그냥 서서 가니까."
"진짜 이해 안 가. 빈자리가 났는데 왜 서서 가? 앉으면 훨씬 편한데."
"조금 있으면 내릴 건데 앉았다 일어나는 게 더 귀찮아서 그렇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빈자리를 대하는 태도조차 이렇게나 달랐다.
'현희의 저 억척스러움이 가끔은 나를 지치게 한다.'
"이번 역은, 합정, 합정역입니다." 안내 방송 자막이 전광판에 무심하게 흘러갔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피곤했다.
에피소드 2: 700미터의 동상이몽
기본요금 택시와 10분 산책, 우리 사이의 거리는?
"시민아, 밥 다 먹었으면 우리 저번에 찾아둔 그 예쁜 카페 가자!"
"그래. 여기서 거리 얼마나 되지? 지도 좀 볼게."
"어, 여기서 한 700미터 정도네. 걸어서 10분이면 가겠다. 걷자."
"700미터? 헐, 안 돼. 나 오늘 치마 입고 구두 신었잖아. 택시 부를게."
"택시? 700미터인데 택시를 타자고? 기본요금 내고 내리면 바로 코앞일 텐데."
"그래도 걷기에는 멀어. 그리고 오늘 날씨도 좀 덥잖아. 화장 다 무너진단 말이야."
"현희야, 요즘 날씨 엄청 선선하고 좋아. 딱 걷기 좋은 날씨인데 굳이 돈 들여서 택시를 탈 필요가 있을까?"
"기본요금 얼마 한다고 그래. 내가 낼게, 부르자 응?"
'내가 돈을 내기 싫어서가 아니다. 10분을 걷지 않으려는 그 과도한 소비 습관이 부담스러운 거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짧은 거리는 그냥 걸어 다니는 게 건강에도 좋잖아."
"나 오늘 너한테 예뻐 보이려고 한 시간 동안 꾸미고 나왔어. 땀 흘리면서 걷기 싫단 말이야."
현희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리면 다툼이 될 게 뻔했다.
"알았어... 내가 미안해. 근데 택시 잡히지도 않을 거리니까, 오늘만 천천히 걸어가자. 내가 손잡아 줄게."
"진짜 짜증 나. 알았어, 걸어. 대신 천천히 가야 해."
우리는 카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선선한 봄바람이 불었지만, 우리 사이의 공기는 미묘하게 뜨겁고 답답했다.
"아, 발뒤꿈치 까진 것 같아... 아파."
"조금만 참아, 저기 골목만 돌면 바로 카페야."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마음의 보폭이 달랐던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구두를 신고 힘겹게 걷는 현희를 보며 미안함보다는 피곤함을 먼저 느꼈다.
'가까운 거리를 산책하듯 함께 걷는 소박한 연애. 나는 왜 그런 평범한 것을 이 애와는 할 수 없을까.'
에피소드 3: 가성비와 가심비
1인당 12만 원의 보상, 누군가에겐 24만 원의 부담.
스물다섯. 아직 취업 준비생인 나와, 이제 막 작은 회사에 취업한 사회 초년생 현희.
"시민아! 나 오늘 첫 월급 받았어! 오늘 저녁은 내가 쏜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진짜? 고생했어 현희야. 근데 첫 월급은 모아둬야지. 그냥 평소 가던 파스타집 갈까?"
"아니야! 오늘같이 특별한 날엔 특별한 걸 먹어야지. 나 저번에 인스타에서 본 오마카세 예약해 뒀어!"
"오마카세? 거기 1인당 10만 원 넘는 곳 아니야?"
"응! 디너 코스로 12만 원이야. 나 돈 벌잖아 이제. 이 정도는 쓸 수 있어!"
"현희야, 너 한 달 월급 뻔히 아는데... 밥 한 끼에 24만 원을 태우는 건 좀 오버 아니야?"
"오버라니. 나 한 달 동안 진짜 힘들게 일했단 말이야. 나를 위한 보상이야, 그리고 너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싶었어."
"마음은 진짜 고마운데... 나는 밥 한 끼에 그렇게 큰돈 쓰는 거 이해가 잘 안 가. 그냥 우리 동네 초밥집 가도 충분히 맛있잖아."
"시민아, 넌 왜 매사를 '가성비'로만 따져? 가끔은 분위기도 즐기고 돈 좀 쓸 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가성비 따지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거지. 그 돈 아끼면 우리 데이트 몇 번을 더 할 수 있는데."
"분위기 다 망치네 진짜. 내가 내 돈 쓰고 너 맛있는 거 사주겠다는데 왜 잔소리야?"
현희의 눈에 서운함이 가득 고였다. 나는 아차 싶어 급히 표정을 풀었다.
"아니야, 잔소리 아니야. 네가 사준다니까 맛있게 먹을게. 고마워, 현희야."
결국 우리는 그 비싼 오마카세 식당에 앉았다.
"이거 봐, 참다랑어 진짜 입에서 살살 녹지 않아? 분위기도 너무 좋고!"
"응, 맛있네. 분위기도 고급스럽고."
나는 웃으며 초밥을 씹었지만, 입안이 모래를 씹는 것처럼 껄끄러웠다.
"이 화려한 공간 속에서 나의 현실적인 걱정들은 한없이 초라한 회색빛으로 변해버렸다."
'한 피스에 만 원이 넘는 초밥. 현희는 가심비(심리적 만족)를 채우며 행복해하지만, 나는 이 허세스러운 공간이 너무나도 불편하다.'
에피소드 4: 마모되는 감정들
할인 영화와 특가 호캉스 사이에서 마모되는 2년의 시간.
"현희야, 이번 주말에 영화 볼까? 통신사 할인받으면 무료로 볼 수 있거든."
"영화? 나 주말에 호캉스 가고 싶었는데... 요새 호텔 특가 많이 나오던데."
또 시작이다.
"우리 저번 달에도 호캉스 갔었잖아. 너 카드값 많이 나왔다며."
"그건 저번 달이고... 요새 회사 스트레스 너무 심해서 푹신한 침대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룸서비스 시켜 먹고 싶단 말이야."
"나는 아직 취준생이라 비용 반반 내기도 버거워. 네가 다 낸다고 해도 마음이 안 편해."
"내가 언제 돈 내라고 눈치 준 적 있어? 그냥 같이 좋은 시간 보내자는 건데 왜 맨날 돈 얘기로 사람 기를 죽여?"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너는 기가 죽는 게 아니라 철이 없는 거야.' 이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삼켰다.
"알았어, 미안해. 내가 요새 취업 준비 때문에 예민해서 그래. 호텔 알아볼게."
"아니야, 됐어. 네가 그렇게 억지로 맞춰주는 티 내면 내가 뭐가 돼. 그냥 영화 봐."
결국 우리는 영화관에 왔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스크린을 보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 별로 재미없었지? 중간에 계속 하품하더라."
"어?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볼 만했어."
거짓말. 나는 네가 지루해서 휴대폰 액정을 세 번이나 켜서 본 걸 알고 있다.
"시민아, 우리 요새 왜 이렇게 안 맞지?"
현희가 팝콘 통을 매만지며 낮게 중얼거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소리야. 안 맞긴, 우리가 2년을 만났는데."
"그냥... 넌 돈 아끼고 걷는 걸 좋아하고, 난 돈 쓰고 편하게 다니는 걸 좋아하잖아. 그 사소한 것들이 요새 너무 크게 느껴져."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감정만으로 덮어두기엔, 우리는 일상의 모든 조각이 엇갈리고 있었다.
에피소드 5: 사랑한다는 위약
김치볶음밥과 4천 원의 마카롱, 엇갈리는 합리적 소비.
다툼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입버릇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했다.
"시민아, 나 진짜 너밖에 없어. 사랑해."
"응, 나도 많이 사랑해 현희야."
마치 그 말이 우리의 다름을 치료해 줄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병을 고치지 못하는 가짜 약, '플라시보(위약)'에 불과했다.
"아무 조건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던 그 시절의 빛바랜 기억들이 야속하게 스쳐 지나갔다."
"현희야, 오늘 저녁은 집에서 내가 김치볶음밥 해줄게. 요새 밖에서 너무 사 먹었어."
"아... 나 오늘 인스타에서 핫한 그 디저트 카페 가고 싶었는데... 마카롱 포장해 가면 안 돼?"
"거기 마카롱 하나에 4천 원이잖아. 밥값보다 비싸. 그냥 집 앞 베이커리에서 빵 사 갈게."
"진짜 너무한다. 내가 뭐 명품 가방을 사달래? 고작 4천 원짜리 디저트 하나 먹고 싶다는데 그것도 눈치를 봐야 해?"
"누가 눈치를 줬어. 합리적인 소비를 하자는 거지. 넌 항상 그런 식으로 기분파로 돈을 쓰잖아."
"합리적? 너한테 합리적인 건 무조건 돈 안 쓰고 궁상맞게 구는 거잖아!"
현희의 입에서 기어코 '궁상'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내 자존심의 가장 밑바닥을 긁는 뾰족한 단어.
"그래, 나 궁상맞다. 너랑 안 맞게 가난해서 미안하네."
"내 말이 그게 아니잖아... 왜 또 말을 그렇게 비꼬아서 해?"
"현희야, 나 좀 지친다. 오늘은 그냥 집에 갈게."
"임시민! 너 여기서 가면 우리 끝인 줄 알아!"
나는 현희를 뒤로하고 돌아섰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10분의 시간 동안, 현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우리는 사랑한다. 하지만 서로의 일상을 갉아먹고 있다. 이 사랑은 이제 독이다.'
에피소드 6: 우리의 2주년
4만 원의 립스틱과 80만 원의 지갑, 그 무거운 온도 차.
싸운 지 3일 만에 현희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내일은 우리의 2주년이었다.
"시민아, 내일 우리 2주년이잖아. 싸운 건 싸운 거고, 내일은 웃으면서 보자. 예약해 둔 식당에서 봐."
나는 고마움과 미안함에 밤새 고민하여 작은 선물을 하나 샀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나는 조금 긴장한 채로 현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현희야, 2주년 축하해. 이거... 별거 아니지만 받아."
나는 평소 현희가 갖고 싶어 하던 중저가 브랜드의 립스틱을 건넸다. 내 용돈 선에서는 최선이었다.
"고마워 시민아, 색깔 예쁘다. 잘 쓸게."
현희는 환하게 웃었지만, 나는 그녀의 미소 속에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아쉬움을 보았다.
"자, 이건 내 선물! 시민이 너 요새 지갑 낡았길래 새로 샀어."
현희가 건넨 쇼핑백에는 누구나 아는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하지만 내 눈앞에 놓인 그 반짝이는 로고는 기쁨보다는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현희야... 이거 엄청 비싼 거잖아. 네가 무리해서 이런 걸 왜 사."
"2주년이잖아! 하나뿐인 내 남자친구한테 이 정도도 못 해줘? 예쁘게 써."
가슴이 콱 막혀왔다. 고맙다는 말보다 부담감과 부끄러움이 먼저 밀려왔다.
"현희야, 나는 이런 거 못 해줘. 너도 알잖아."
"누가 너한테 똑같은 거 바래? 그냥 내가 해주고 싶어서 한 건데 왜 또 정색이야."
"나는 네가 분수에 맞지 않는 과소비를 하는 게 싫다고. 이거 할부로 샀지?"
"진짜 분위기 파악 못 한다 너. 좋은 날 좋은 거 받고 그냥 고맙다고 한마디 하면 안 돼?"
"이런 식의 선물은 내가 너무 비참해지잖아."
완벽해야 할 2주년 기념일의 밤. 테이블 위에는 4만 원짜리 립스틱과 80만 원짜리 지갑이 이질적으로 놓여 있었다. 우리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에피소드 7: 아주 사소한 균열
소나기 속의 투명 우산과 택시 호출 사이의 균열.
그렇게 2주년을 보내고 난 뒤, 우리는 묘하게 서로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서로의 가치관을 건드리는 대화는 무의식적으로 피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은 일상 곳곳에 묻어있다.
"시민아, 오늘 날씨 우중충하다. 영화관 말고 그냥 우리 드라이브 겸 외곽에 있는 대형 카페 갈까? 쏘카 빌리자."
"외곽? 주말이라 렌트비도 비쌀 텐데. 그냥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시내 카페 가자."
"또, 또 돈 타령. 알았어, 그럼 시내로 가. 버스 정류장까지 얼마나 걸어야 해?"
"하필이면 왜 지금, 우리의 엇갈린 타이밍을 비웃기라도 하듯 매몰찬 소나기가 쏟아지는 걸까."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굵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떡해, 비 오잖아! 나 오늘 새로 산 신발 신었는데!"
"잠시만, 저기 편의점에서 우산 사 올게. 잠깐 비 좀 피하고 있어."
내가 편의점에서 6천 원짜리 투명 우산 하나를 사서 뛰어왔을 때, 현희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
"시민아, 우리 그냥 택시 타자. 우산 하나로 둘이 어떻게 써. 옷 다 젖어."
"버스 정류장 바로 저긴데 뭘 택시를 타. 내가 어깨 다 맞을 테니까 넌 내 쪽으로 붙어."
나는 현희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정류장으로 이끌었지만, 현희는 내 손을 뿌리쳤다.
"됐어. 옷 젖는 것도 싫고, 너 궁상맞게 비 맞는 거 보는 것도 싫어. 택시 부를 거야."
현희의 말은 빗소리보다 더 차갑게 내 심장에 꽂혔다.
"현희야. 내가 비 좀 맞으면서 아끼려는 게 왜 궁상이야. 이건 그냥 내 삶의 방식이야."
"아니, 넌 그냥 나를 편하게 해줄 마음이 없는 거야. 돈 몇천 원이 나보다 중요하니까!"
"억지 좀 부리지 마. 내가 널 안 사랑해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그 순간, 겨우겨우 이어 붙이고 있던 우리 관계의 마지막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 시민아, 우리는 사랑 빼고는 맞는 게 단 하나도 없어. 안 그래?"
에피소드 8: 예고된 침묵
비에 젖은 투명 우산 하나를 남기고 떠난 택시.
현희의 입에서 튀어나온 '사랑 빼고는 맞는 게 없다'는 말.
그 말이 우리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 많이 온다. 우산 쓰고 있어. 내가 택시 잡아줄게."
나는 내 손에 들린 투명 우산을 현희에게 쥐여주며 말했다.
"됐어. 나 그냥 집에 갈래. 기분 다 망쳤어."
현희는 지나가던 빈 택시를 잡아타고 휙 떠나버렸다. 나는 비를 맞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우리가 왜 이렇게 엉켜버렸는지 자책했다."
축축하게 젖은 옷, 한숨이 절로 나오는 습한 공기. 버스 안은 고요했다.
'현희의 말이 맞다. 나는 걷는 걸 좋아하고, 그녀는 택시를 좋아한다. 나는 모으는 게 편하고, 그녀는 쓰는 게 즐겁다.'
'지하철을 타면 나는 서서 가는 게 편하고, 그녀는 어떻게든 자리에 앉아야 직성이 풀린다.'
누가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다. 그저 너무나도 달랐고, 그 다름이 쌓여 서로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
현희에게서 카톡이 왔다.
"시민아. 우리 내일 저녁에 잠깐 만날까. 할 얘기가 있어."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안다.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한편으로는 꽉 막혀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기이한 후련함도 느껴졌다.
"응. 내일 8시에 우리 자주 가던 그 카페에서 보자."
나는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더 미워지기 전에,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내기 전에 여기서 멈춰야 한다.
"더 이상 서로를 원망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는 서서히, 완벽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별을 직감했다.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내일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서로 완벽하게 이해했다.
에피소드 9: 안녕을 말하는 테이블
식어가는 아메리카노 두 잔과 함께 나눈 마지막 대화.
다음 날 저녁 8시. 동네의 작은 프랜차이즈 카페.
내가 먼저 도착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켜두고 앉아 있었다.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현희가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어제보다 훨씬 차분했다.
"왔어? 비는 이제 안 오네."
"응. 커피 시켜놨어? 고마워."
현희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리고 창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시민아. 나 어제 밤새 한숨도 못 잤어."
"나도 그래. 생각이 많아지더라."
"너랑 만났던 2년. 진짜 행복했어. 네가 나 데려다준다고 걷던 길들, 나 아플 때 밤새 간호해 줬던 거, 다 기억나."
현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 역시 코끝이 찡해져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근데 시민아. 우리는 서로 너무 좋은 사람인데... 너무 안 맞는 사람인 것 같아."
"응, 알아. 넌 택시 타는 게 편하고, 난 걷는 게 편하니까. 그냥 그뿐인 거야."
"맞아. 누가 나쁜 게 아니야. 그냥 내 발은 구두를 신고 있어서 걷기가 너무 아팠고, 넌 내 템포에 맞춰서 천천히 걷느라 지친 거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순간, 더 이상의 원망은 남지 않았다.
"시민아, 나는 네가 돈을 아끼려는 마음을 존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널 초라하게 만들려던 건 진짜 아니었어."
"나도 미안해. 네가 기분 내고 싶어 하는 걸 잔소리로 막아서. 너는 빛나고 화려한 걸 좋아하는데, 내가 내 세상에 억지로 널 구겨 넣으려고 했어."
현희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나는 말없이 티슈를 건넸다.
"시민아. 우리... 여기까지만 할까?"
나는 현희의 젖은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이제 각자 편한 속도로, 편한 신발 신고 걷자. 그동안 고마웠어, 현희야."
에피소드 10: 엔딩: 흔한 연인들의 흔한 끝
각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신발을 신고 걷는 마지막 인사.
우리는 카페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는 선선하고 쾌적했다.
"갈게. 조심해서 들어가, 시민아."
"잠깐만, 현희야."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택시 호출 앱을 열었다. 목적지를 그녀의 집으로 찍고 결제를 마쳤다.
"'결제 완료. 1분 후 도착.' 화면에 뜬 그 문구가 우리의 마지막 이별 수속처럼 느껴졌다."
"택시 불렀어. 1분 뒤에 올 거야. 구두 신어서 발 아플 텐데 편하게 가."
현희는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넌 항상 마지막까지 착하네. 고마워, 잘 타고 갈게."
이윽고 노란색 택시가 우리 앞에 섰다. 현희가 뒷좌석에 올라탔다.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붉은 불빛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잘 가, 푹 쉬어." 나의 마지막 인사에 현희는 창문을 내리고 작게 손을 흔들었다.
택시는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가더니 이내 어두운 도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고 편안한 택시를 타고 떠났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녀가 남긴 온기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현희와 함께했던 소란스러웠던 시간이 완전히 끝나고, 오롯이 나 혼자 남은 차가운 새벽이 찾아왔다."
이제 나는 다시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돌아간다.
나는 700미터 떨어진 지하철역을 향해 두 다리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꽂고,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익숙하게 기둥에 기대어 서서 갈 것이다. 빈자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필요 없이, 내 체력에 맞게.
누군가가 잘못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평범해서, 서로의 일상을 도저히 깎아낼 수 없어 헤어졌다.
한때 나의 모든 것이었던, 그러나 나와는 지독하게도 보폭이 달랐던 너. 아주 흔한 우리의 이별이 이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