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USB와 진짜 여왕
사라진 여왕, 그리고 드러나는 추악한 비밀들.
에피소드
붉은 USB와 진짜 여왕 — 작품 소개
사라진 여왕, 그리고 드러나는 추악한 비밀들.
#학원물 #스릴러 · 10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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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사라진 여왕과 붉은색 USB
여왕이 남기고 간 위험한 유산.
대한민국 상위 0.1%만 모인다는 세운 명문고. 이곳의 아침은 언제나 숨 막히게 고요하다.
하지만 오늘 아침, 3학년 1반 교실은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우리의 '여왕' 차유진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이 전학 갔대. 어제 밤에 갑자기 짐 다 뺐다던데?" 누군가의 속삭임이 교실을 맴돌았다.
전교 1등, 재단 이사장의 조카,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 그런 그녀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증발했다.
담임은 창백한 얼굴로 들어와 출석부를 덮으며 짧게 말했다. "차유진 학생은 개인 사정으로 자퇴했다. 질문은 받지 않겠다."
자퇴? 나는 책상에 턱을 괸 채 코웃음을 쳤다. 어제 방과 후, 도서관에서 그녀가 누군가와 매섭게 다투는 걸 들은 유일한 목격자가 바로 나, 이시아였으니까.
쉬는 시간, 나는 아무도 몰래 교실 뒤편에 있는 유진의 사물함으로 향했다.
사물함은 이미 깔끔하게 비워져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물함 바닥 패널을 이중으로 개조해 비밀 공간을 쓴다는 것을.
딸깍. 얇은 자를 틈새로 밀어 넣자 바닥이 들리며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피처럼 붉은색을 띤 작은 USB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것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도서관 구석의 정보 검색용 컴퓨터로 향했다.
USB를 본체에 꽂자마자, 모니터 화면이 검게 변하더니 하얀색 텍스트가 타자기를 치듯 떠올랐다.
『이시아. 네가 이걸 열어볼 줄 알았어. 넌 항상 눈치가 빨랐으니까.』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유진은 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조차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도망친 게 아니야. 쫓겨난 거지. 내 입을 막으려는 쓰레기들한테.』
화면에는 교장, 학부모 대표, 그리고 몇몇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폴더들이 끝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세운고의 추악한 비밀은 전부 이 안에 있어. 내가 사라졌다면, 첫 번째 타겟은 수학 선생이야.』
『이시아, 너라면 내 복수를 대신해 줄 수 있겠지. 게임을 시작할게.』
그 순간, 내 스마트폰을 포함해 도서관에 있던 모든 학생들의 핸드폰이 동시에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 제한 번호로 온 문자 한 통. [세운고의 쓰레기통을 엽니다. 첫 번째: 위선자의 가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에피소드 2: 첫 번째 타겟: 위선자의 가면
폭로된 비밀, 그리고 시작되는 심판.
오전 10시. 학교는 정체불명의 문자로 인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선생님들은 당황하며 학생들의 휴대폰을 압수하려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소문은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나는 화장실 칸에 숨어 유진의 USB 속 '수학 선생' 폴더를 열었다. 화면을 채운 건 수십 장의 계좌 이체 내역과 메신저 캡처본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다정하고 인자하기로 소문난 '천사' 강 선생. 하지만 캡처본 속 그의 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기말고사 수학 서술형 답안입니다. 약속하신 금액은 도박장 계좌가 아닌, 제 차명 계좌로 부탁드립니다, 사모님.]
VIP 학부모들에게 시험지를 유출하고 그 돈으로 불법 도박을 일삼고 있었다. 유진은 이 사실을 알았기에 그에게 협박당해 쫓겨난 것이다.
"위선자 새끼." 나는 화면 속 증거들을 교내 인트라넷 서버에 익명으로 업로드할 준비를 마쳤다. 타이머는 강 선생의 수업 시간인 4교시 정각으로 맞췄다.
4교시 수학 시간. 강 선생은 평소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교실로 들어왔다.
"자, 우리 반. 흉흉한 문자는 신경 쓰지 말고, 곧 있을 모의고사에 집중하자. 알겠지?"
가증스러운 목소리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책상 밑으로 스마트폰을 쥐고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3, 2, 1.
삐-빅! 칠판을 대신하고 있던 거대한 스마트보드의 화면이 갑자기 시퍼렇게 변했다.
"어? 이거 왜 이래?" 강 선생이 당황하며 마우스를 흔들었지만, 시스템은 이미 내 통제 하에 있었다.
[강민우 교사의 이중생활 - VIP 시험지 단가표]
이어서 그가 학부모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와, 불법 도박장에서 돈을 잃고 찍힌 비굴한 사진들이 슬라이드쇼처럼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이, 이게 무슨... 꺼! 당장 끄라고!!" 강 선생이 이성을 잃고 스마트보드의 전원 코드를 뽑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교내 방송실 서버와 연동해 두었기 때문에, 이 화면은 지금 전 교실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반 아이들은 경악에 찬 얼굴로 강 선생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과외를 받던 몇몇 아이들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선생님... 저거 다 진짜예요? 우리 반 애들한테 돈 받고 시험지 파신 거예요?" 반장의 떨리는 목소리에 강 선생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턱을 괸 채,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을 가만히 감상했다. 추악한 비밀이 벗겨지는 순간은 짜릿했다.
주머니 속 유진의 USB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하나 치웠네.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에피소드 3: 소시오패스의 무대
착한 모범생의 가면 뒤에 숨겨진 광기.
수학 선생이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오르는 모습은 교실 창문을 통해 전교생에게 생중계되었다.
학교는 통제 불능의 아수라장이 되었고, 복도에는 아이들의 비명과 환호, 욕설이 뒤섞여 메아리쳤다.
나는 그 혼란을 등지고 조용히 인적 드문 구관의 빈 음악실로 향했다.
문이 닫히고 완벽한 정적이 찾아오자,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듯 낮게 웃기 시작했다.
"큭... 크큭, 하하하!" 웃음소리가 텅 빈 음악실 안을 섬뜩하게 울렸다.
유진이 내게 남긴 메시지. 『너라면 내 복수를 대신해 줄 수 있겠지.』
차유진. 넌 대단한 착각을 했어. 내가 널 돕는 게 아니야.
어릴 적부터 나는 남들이 절망하고 파멸하는 표정을 볼 때만 살아있음을 느꼈다.
누군가의 약점을 쥐고 흔들며, 그들이 쌓아올린 모래성이 무너지는 걸 보는 건 최고의 오락거리였다.
하지만 이 지루하고 보수적인 세운고에서는 철저히 평범하고 '착한 모범생'의 가면을 써야만 했다.
조용히 숨죽여 지내던 나에게, 유진은 아주 완벽하고 파괴적인 '장난감'을 제 발로 쥐여준 셈이다.
자신이 이 판의 지배자라고 믿는 멍청하고 오만한 여왕님.
"정의? 복수? 그런 시시한 감정은 내게 없어."
나는 주머니에서 붉은색 USB를 꺼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 안에는 학교를 잿더미로 만들 화약이 가득하다. 불을 붙이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다.
음악실 구석에 먼지 쌓인 그랜드 피아노 의자에 앉아,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USB를 연결하고, 두 번째 타겟의 폴더를 천천히 스크롤했다.
[학생회장 김상욱 - 학교폭력 위원회 은폐 기록 및 매수 내역]
"완벽한 황태자님. 너의 그 잘난 미소가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네."
나는 피아노 건반을 '쾅' 하고 내리치며, 두 번째 폭로의 실행 버튼을 눌렀다.
에피소드 4: 두 번째 타겟: 황태자의 추락
우상의 추락, 그리고 식당에 울려 퍼진 목소리.
다음 날 점심시간. 학생식당은 어제의 사건으로 여전히 공포와 흥분으로 뒤숭숭했다.
그 중심에서 학생회장 김상욱이 특유의 듬직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다들 동요하지 마. 학교 측에서 유언비어 유포자를 철저히 조사 중이니까, 곧 안정을 찾을 거야."
그의 뒤로는 식당의 대형 TV 화면이 지루한 교육청 뉴스를 송출하고 있었다.
나는 식판을 들고 식당에서 가장 전체가 잘 내려다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포크로 샐러드를 뒤적이며, 식탁 아래로 스마트폰의 원격 제어 앱을 켰다.
타이머는 정확히 점심시간 한가운데인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 2, 1.
치직, 칙-! 식당의 대형 TV 화면이 갑자기 검게 변하더니 거친 노이즈가 발생했다.
"뭐야? TV 왜 저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화면으로 쏠렸다.
화면에는 어두운 창고에서 김상욱이 동급생의 뺨을 무자비하게 후려치는 CCTV 영상이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이어서 소름 끼치도록 또렷한 녹음본이 식당 전체의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교장 쌤, 제 생기부 관리 똑바로 해주셔야죠. 저런 찌질이 하나 자퇴시키는 거 일도 아니잖아요?』
『우리 아빠가 이 학교 재단에 꽂아준 돈이 얼만데. 알아서 기셔야지.』
김상욱의 오만한 목소리였다. 수백 명이 모인 식당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아, 아니야! 저건 딥페이크야! 조작된 거라고!" 김상욱이 식판을 엎으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동공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이들의 시선이 경외심에서 경멸과 혐오로 바뀌었다.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조차 벌레 보듯 뒷걸음질을 쳤다.
단상에서 추락해 바닥을 기어 다니는 황태자의 꼴이라니.
나는 방울토마토를 입에 쏙 넣으며, 그 처참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맛있네." 나의 입 모양을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피소드 5: 광기의 전염
서로를 의심하는 아이들, 그 사이에서 웃는 자.
세운고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교사들은 서로를 불신했고, 학생들은 분열되었다.
수학 선생과 학생회장이 날아간 이후, 다음 타겟이 누가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졌다.
경찰 수사대가 학교 서버를 뒤지며 IP 추적을 시도했지만, 나는 애초에 학교 근처에도 안 갔다.
유진이 심어둔 우회 프로그램에 내가 만든 백도어 트랩을 겹겹이 씌워 추적을 완벽히 차단했다.
쉬는 시간, 반 단톡방에 또다시 익명의 링크가 하나 올라왔다. 이번엔 교무부장 차례였다.
[교무부장 박상태 - 특정 학부모와의 부적절한 관계 및 내신 시험지 사전 유출 정황]
링크를 누르자 모텔로 들어가는 교무부장의 사진과, 노골적인 카톡 내용이 쏟아졌다.
징, 지징, 징-! 교실 여기저기서 경악에 찬 알림음이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미친... 교무부장이 나은이 엄마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은이가 비명을 지르며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이들은 이제 수군거림을 넘어, 대놓고 서로를 조롱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시아... 나 너무 무서워. 우리 학교 어떻게 되는 거야?"
내 짝꿍 수진이가 덜덜 떨며 내 팔짱을 꽉 껴안았다.
나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다정한 목소리로 수진이를 토닥였다.
"괜찮을 거야, 수진아. 너무 걱정하지 마. 경찰이 범인을 꼭 잡을 테니까."
품에 안긴 수진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내 얼굴의 자애로운 미소는 순식간에 지워졌다.
유진이 남긴 데이터는 훌륭했지만, 나는 거기에 내 입맛대로 가짜 단서들을 섞어 넣었다.
학생들이 폭로자의 정체를 놓고 서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작은 이간질의 씨앗들.
우정, 신뢰, 도덕. 이딴 가식적인 껍데기들이 불타 없어지는 냄새는 정말 달콤했다.
자, 불길을 더 크게 키워볼까? 다음 장작을 넣을 시간이다.
에피소드 6: 가짜 꼬리표
완벽한 설계, 그리고 새로운 여왕의 탄생.
일주일 만에 세운고는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교육청은 임시 휴교령을 내렸고, 이사장은 구속 수사를 받게 되었다.
경찰 사이버 수사대는 이 전대미문의 해킹 폭로 사건의 주동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방과 후 텅 빈 내 방. 나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모니터 불빛에만 의지한 채 키보드를 두드렸다.
경찰이 슬슬 꼬리를 잡을 타이밍이었다. 아니, 내가 잡혀줄 타이밍이었다.
나는 방화벽을 일부러 한 겹 해제하고, 내가 사용하던 우회 IP의 최종 종착지를 재설정했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차유진의 오래된 노트북 맥(MAC) 주소와, 그녀가 쓰던 해외 클라우드 서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폭로 글의 문맥 사이에 유진이 평소 즐겨 쓰던 특유의 어투와 기호들을 교묘하게 심어두었다.
사건의 모든 디지털 발자국이, 완벽하게 하나의 지점을 가리키도록.
"천재적인 두뇌로 학교의 비리를 캤지만, 꼬리가 밟힐까 봐 자퇴로 위장한 뒤 복수극을 펼친 타락한 여왕."
내가 쓴 시나리오였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나 완벽하고 매혹적인 스토리였다.
경찰은 이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절대 지나치지 못할 것이다.
딸깍. 마지막 엔터키를 누르자 데이터 전송 완료 창이 떴다.
이로써 내 흔적은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졌고, 모든 화살은 유진을 향해 날아갔다.
"이제 무대 세팅은 끝났어, 유진아."
나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드레날린이었다.
그때, 창밖으로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블라인드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사이렌 소리는 우리 집이 아니라, 부촌인 유진의 동네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경찰이 내가 흘린 빵 부스러기를 정확히 따라간 것이다.
"사냥개가 드디어 냄새를 맡았네."
나는 책상 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모범생 이시아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괴물이 웃고 있었다.
에피소드 7: 불타는 성벽의 끝
폐허가 된 학교, 그리고 약속된 만남.
사건 발생 10일 차. 세운고의 모든 민낯이 뉴스 1면을 장식했다.
'명문고의 추악한 이면', '비리 백화점 세운고, 결국 폐교 수순 밟나'.
기자들은 학교 교문에 진을 치고 있었고, 분노한 학부모들은 계란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다.
그 철옹성 같던 학교가 단 한 명의 익명 폭로자에 의해 가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그 아수라장을 구경하며 길을 걸었다.
한때 나를 무시하고 짓밟았던 선생들, 잘난 척하던 동급생들이 바닥을 기며 서로를 탓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 게임의 진정한 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차유진.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충실한 체스말로서, 그녀가 지시한 타겟들을 성실히 파멸시켰다고 생각하겠지.
나는 발걸음을 돌려 굳게 닫힌 학교의 후문 담장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경비는 느슨해져 있었고, 학교 안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휴교령으로 인해 텅 빈 복도를 걷는 기분은 마치 폐허가 된 왕성을 산책하는 정복자의 기분이었다.
내 발소리만이 적막한 복도를 울렸다. 또각, 또각.
내가 향한 곳은 학교 건물의 가장 안쪽, 먼지가 쌓인 구관 도서관이었다.
이곳은 CCTV도 없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유진과 내가 유일하게 접선하던 장소였다.
나는 도서관 창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창밖으로는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노을빛을 받은 세운고의 교정이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스마트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50분. 그녀가 나타날 시간이다.
"빨리 와, 여왕님. 시상식을 해야지."
나는 주머니 속의 붉은색 USB를 만지작거리며, 문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에피소드 8: 여왕의 귀환
오만한 지배자, 그리고 반전의 서막.
오후 6시 정각. 도서관의 낡은 나무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먼지 섞인 공기를 가르고 나타난 것은, 자취를 감췄던 세운고의 여왕 차유진이었다.
며칠 동안 숨어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는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오만한 턱선, 상대를 내려다보는 서늘한 눈빛. 그녀는 승리자의 태도를 뽐내고 있었다.
뚜벅뚜벅. 유진의 구두 발소리가 도서관의 적막을 깼다.
"훌륭해, 이시아. 내 기대 이상이야." 유진이 내 앞에 멈춰 서며 입을 열었다.
"나를 쫓아냈던 쓰레기들이 다 치워졌으니, 이제 내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가 됐지."
나는 창가에서 내려와 순종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시대로 했어, 유진아."
유진은 만족스러운 듯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네 약점을 잡길 잘했네. 쓸만한 사냥개였어."
그녀는 자신이 나를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고했어. 이제 USB는 돌려줘. 남은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유진이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천천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붉은색 USB를 꺼내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유진이 USB를 움켜쥐는 순간, 나는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유진아. 경찰이 계속 IP를 추적하던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유진은 비웃었다. "멍청하긴. 내가 준 우회 서버는 절대 뚫릴 일 없어. 경찰들은 지금쯤 허공에 삽질이나 하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어깨를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왜 그래? 겁먹었어?" 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 입가에는 더 이상 순종적인 미소가 아니라, 비릿하고 소름 끼치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아니. 그냥 네가 너무 멍청해서 웃음이 나와서."
유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판이 뒤집히는 소리가 도서관 안을 가득 채웠다.
에피소드 9: 반상 뒤집기
추락하는 여왕, 사냥개의 날카로운 이빨.
"뭐... 멍청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유진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사냥개가 주인의 목을 물어뜯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는 뜻이야."
유진이 쥐고 있던 USB를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노트북에 꽂았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확인해 주지." 그녀의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지만 폴더를 여는 순간, 유진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수백 개의 폭로 자료 대신, 단 하나의 텍스트 파일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Game Over. 차유진]
"이, 이게 뭐야! 원본 데이터 어디 있어!" 유진이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원본? 내 클라우드에 고이 모셔뒀지. 아, 그리고 너한테 한 가지 안 알려준 게 있네."
나는 내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경찰이 허공에 삽질을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정확히 너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거든."
화면에는 방금 전 뜬 속보 기사가 떠 있었다. [단독] 세운고 해킹 폭로 사건 주동자, 자퇴생 차 모 양으로 밝혀져... 자택 압수수색.
"미친년... 네가 내 IP를 땄어?! 경찰한테 넘겼다고?!"
"응. 차유진이 모든 비리의 주동자였고, 꼬리가 밟힐까 봐 폭로자인 척 학교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시나리오. 어때, 재밌지?"
"이시아!! 너 이 악마 같은 년!!" 유진이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비틀어 떼어냈다. 그녀의 힘은 공포로 인해 형편없이 빠져 있었다.
멀리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서관 창밖으로 수대의 경찰차들이 교문을 부수듯 진입하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네 약점도 내가 다 까발려줄게!" 유진이 발악했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아주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해 봐. 협박에 시달려 억지로 심부름을 한 '불쌍한 피해자'의 말을 믿을지, 희대의 사이코패스 해커 차유진의 말을 믿을지 뻔하잖아?"
에피소드 10: 엔딩: 무결점의 포식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게임.
경찰들이 도서관 문을 부수고 들이닥쳤을 때, 나는 바닥에 쓰러져 덜덜 떨며 울고 있었다.
"저 아이가 범인입니다! 차유진을 체포하세요!" 형사들이 유진의 팔을 꺾어 수갑을 채웠다.
유진은 피눈물을 흘리며 내가 진짜 흑막이라고 울부짖었지만, 형사들의 눈에 나는 그저 공포에 질린 가녀린 여고생일 뿐이었다.
모든 디지털 증거와 조작된 메시지 기록은 완벽하게 차유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세운고 스캔들의 주동자 차유진은 구속되었고, 학교는 완전히 공중분해 되었다.
한 달 후, 나는 참고인 조사를 마치고 강남 경찰서 정문을 나섰다.
문 밖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일제히 카메라 셔터가 터졌다.
찰칵, 찰칵, 찰칵-!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눈부신 플래시 세례.
"이시아 학생! 차유진의 협박을 받았을 때 심정이 어땠나요!"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카메라를 향해 어깨를 가늘게 떨며 연기를 시작했다.
"너무... 무서웠어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차유진이 제발 죗값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내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연약하고 애처로웠다. 기자들은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형사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세단 뒷좌석에 올라탔다.
쾅. 차문이 닫히고 짙게 선팅 된 창문이 외부의 시선과 소음을 완벽히 차단했다.
그 순간, 내 얼굴을 덮고 있던 두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두려움에 떨던 불쌍한 소녀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짙은 환희에 찬 포식자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말이지, 내 인생 최고의 체스 게임이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마트폰을 열고 검색창을 띄웠다.
스마트폰 화면이 꺼지고, 검은 액정 위로 비친 내가 똑바로 앞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다음은, 지금 이걸 보고 있는 네 차례일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