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선
사라진 전교 1등, 그리고 캄캄한 어둠 속에 쳐진 보이지 않는 선. 진실은 무엇인가?
에피소드
보이지 않는 선 — 작품 소개
사라진 전교 1등, 그리고 캄캄한 어둠 속에 쳐진 보이지 않는 선. 진실은 무엇인가?
#미스터리 #스릴러 #학원물 · 10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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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사라진 전교 1등
폐교된 구관 건물에서 시작된 숨바꼭질, 그리고 사라진 은호.
"야, 우리 진짜 여기서 숨바꼭질한다고? 먼지 냄새 장난 아닌데."
"수능도 끝났는데 이 정도 일탈은 해야지. 쫄았냐, 백재영?"
은호가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재영의 어깨를 툭 쳤다. 재영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쫄긴 누가 쫄아! 귀신 나오면 네가 책임져라. 빨리 술래나 정해."
"가위바위보! 아, 내가 술래네. 오늘 운 진짜 없네."
전교 2등인 나, 지현이 한숨을 쉬며 벽에 이마를 기댔다. "술래는 1층 중앙 현관에서 100초 세고 올라오기다. 알았지?"
"지현아, 100초 꽉 채워서 세야 해! 나 진짜 못 찾는 곳에 숨을 거니까!"
하늘이가 킥킥거리며 2층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은호와 재영이도 각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나, 둘, 셋..." 나는 먼지 쌓인 1층 벽에 기대어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아흔여덟, 아흔아홉, 백! 찾는다!' 나는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숨었냐, 이것들아. 구관은 넓어서 찾기도 힘든데."
"백재영! 너 과학실 책상 밑에 숨은 거 다 보여! 덩치도 큰 게 거기 들어가냐?"
"아씨, 어떻게 알았냐? 나름 완벽했는데." 재영이 머리에 거미줄을 잔뜩 묻힌 채 툴툴거리며 걸어 나왔다.
"이제 3층으로 가자." 우리는 3층으로 올라갔다. 적막한 복도에 우리 둘의 발소리만 크게 울렸다.
"이하늘, 찾았다! 이젤 뒤에 다리 삐져나왔어. 너흰 숨는 스킬이 다 왜 이러냐?"
"아, 지현이 눈치 진짜 빠르네. 은호는 찾았어?" 하늘이가 먼지를 털며 미술실에서 걸어 나왔다.
"아니, 이제 강은호 하나 남았어. 얘 어디 숨었지? 4층 옥상으로 올라갔나?"
우리는 4층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은호는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야, 강은호 전화도 안 받아. 벌써 1시간 지났는데. 집에 간 거 아니야?"
"은호가 그럴 애는 아닌데... 지는 거 싫어해서 우리가 찾을 때까지 기다릴 텐데." 우리는 찝찝함을 안고 구관을 빠져나왔다. 그것이 은호의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에피소드 2: 자정의 속보
은호의 충격적인 사망 소식, 그리고 경찰 조사.
그날 자정. 나는 침대에 누워 영어 단어장을 넘기고 있었다. 수능이 끝났어도 불안함에 잠이 오지 않았다.
"어? 하늘이네. 이 시간에 웬일이지? 은호한테 연락 왔나?"
"여보세요? 하늘아 왜."
"지, 지현아... 너 지금 당장 뉴스 틀어봐... 빨리!" 수화기 너머 하늘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며 오열하고 있었다.
"뉴스? 갑자기 무슨 뉴스..." 나는 리모컨을 찾아 서둘러 TV를 켰다.
"오늘 밤 11시경, 시내의 한 고등학교 폐건물 3층 계단에서 10대 남학생이 추락해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거짓말... 은호라고? 우리가 아까까지 같이 있던 강은호가 죽었다고?"
나는 들고 있던 단어장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사망 원인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며 발생한 경추 골절로 추정되며, 경찰은 실족사에 무게를 두고...'
"지현아, 어떡해! 은호 우리가 찾다 만 거잖아. 우리가 끝까지 찾았으면 살았을까?"
"하늘아, 진정해. 울지 말고 내 말 들어. 일단 내일 아침에 경찰 조사받아야 할지도 몰라."
'백재영, 너 뉴스 봤어? 당장 전화 좀 받아봐.' 재영이는 끝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정문 앞에는 취재진이 깔렸고, 우리 세 명은 형사들에게 이끌려 경찰서로 향했다.
"그러니까, 숨바꼭질을 하던 중에 피해자 혼자 넘어져서 사고가 났다는 거죠?"
담당 형사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우리 셋을 번갈아 보며 볼펜을 딱딱거렸다.
"네... 건물이 워낙 어두웠고, 은호가 술래를 피해서 급하게 뛰어가다가 계단에서 헛디딘 것 같습니다."
재영이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현장 감식과 부검 결과도 단순 실족사로 보이니, 일단 귀가들 하세요. 충격이 크겠네요."
"다행이다... 사고로 종결되려나 봐. 하아..." 하늘이가 벽에 기대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니, 사고 아니야."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두 사람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강은호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거야."
에피소드 3: 각자의 지옥
친구들을 의심하기 시작한 지현, 그리고 드러나는 갈등.
"지현아, 너 지금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는 거야? 누가 은호를 죽여!"
재영이 화들짝 놀라며 내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그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구관 3층 계단, 평소에 우리가 몰래 땡땡이칠 때 수백 번도 더 오르락내리락했던 곳이야."
"그 익숙한 계단을 은호가 헛디뎌서 죽었다고? 아무리 어두워도 강은호 운동신경이면 난간을 잡고도 남았어."
"어, 어두웠잖아! 손전등도 안 켜고 도망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너 왜 자꾸 소설을 써!" 하늘이도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너희 둘, 은호한테 쌓인 거 많았잖아. 은호 죽었을 때 내심 속 시원했던 사람, 여기 우리 셋 말고 또 있어?"
나의 도발적인 질문에, 재영과 하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도 선뜻 부정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의 지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강은호. 집안 좋고, 외모 좋고, 머리까지 완벽했던 전교 1등. 하지만 타인을 짓밟는 데에는 죄책감이 없는 소시오패스 같은 녀석.
"그래, 나 은호 싫어했어. 근데 사람을 죽이진 않아. 너야말로 만년 2등이라서 은호 제일 혐오했잖아!"
재영이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반격했다. 하늘이도 내 눈치를 살폈다.
'맞아. 나도 동기는 충분해. 강은호가 죽기를 수천 번도 더 바랐으니까. 하지만 난 범인이 아니야.'
"나는 술래였어. 1층 현관에 계속 있었고, 너희 둘이 차례로 발견될 때까지 동선이 완벽하게 겹치지."
"하지만 너희 둘은? 100초 동안 어디서 무얼 했는지 증명할 수 있어?"
"내가 과학실에 있을 때, 재영이 네가 3층에 안 올라갔다는 증거 있어?"
"하늘이 네가 3층 미술실에 숨기 전에 복도에서 은호를 마주치지 않았다는 증거는?"
"너 지금... 우리를 살인자로 의심하는 거야? 넌 네 친구를 살인귀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 하늘이가 눈물을 터뜨렸다.
"경찰은 단순 사고로 덮겠지만, 나는 알아낼 거야. 우리 중에 누가 은호를 그 캄캄한 계단에서 밀어버렸는지."
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차갑게 돌아섰다. 내 머릿속은 이미 사건 당일의 타임라인을 분 단위로 쪼개며 재구성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온 지현이 방 안의 화이트보드에 붉은 마커로 이름들을 휘갈겨 썼다.
'강은호. 네가 죽은 건 하나도 슬프지 않아. 하지만 이 찝찝한 미제 사건은 못 참아.' 나는 첫 번째 용의자로, 만년 2등이었던 '나 자신'부터 철저하게 파헤치기로 했다.
에피소드 4: 나의 동기, 2등의 열등감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진 지현, 그리고 2등의 아픔.
화이트보드에 내 이름 '임지현'을 쓰고, 그 아래에 붉은색 펜으로 '동기: 전교 1등에 대한 열등감'이라고 적었다.
가장 완벽한 살인은 동기가 가장 뚜렷한 사람부터 용의선상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동기를 먼저 점검해야 했다.
"은호야, 이번 기말고사도 올 1등급이네. 지현이는 수학에서 하나 틀려서 아쉽게 또 2등이네."
"지현이도 엄청 열심히 하잖아요. 맨날 쌍코피 터지면서 공부하던데. 제가 머리가 조금 더 좋은 걸 어쩌겠어요, 선생님."
지현이 숨죽여 분노하며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시험지를 북북 찢어버렸다.
그 잘난 척하는 웃음소리. 아무리 밤을 새워 공부해도, 한 번 스윽 읽고 모든 걸 외워버리는 천재를 노력만으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지현아, 이번 모의고사 29번 풀었어? 아, 못 풀었구나. 표정 보니까 알겠다. 내가 점심시간에 칠판에 풀어줄까?"
은호는 항상 친절을 가장하여 내 자존심을 짓밟았다. 교묘하고 악랄하게.
'그래. 나는 분명 강은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은호가 없어야 내가 전교 1등이 되고, 내가 원하는 대학에 수석으로 갈 수 있었으니까. 내 동기는 누구보다 완벽한 살인 동기였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를 죽일 수 없어."
화이트보드의 '임지현' 이름 위에 파란색 마커로 크게 'X'표를 그었다.
숨바꼭질 당일. 나는 1층 현관에서 정확히 100초를 세고 있었다. 구관 1층 현관 앞에는 고장 난 자판기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자판기는 음료는 안 나왔지만, 형광등 불빛은 밤새도록 밝게 켜져 있었다.
"그리고 구관 건물 밖에 주차되어 있던, 경비 아저씨의 소나타 차량."
나는 경찰 조사 때 슬쩍 모니터를 훔쳐보며 알리바이를 확인했었다.
블랙박스 화면 속, 자판기 불빛을 받으며 벽에 기대어 숫자를 세고 있는 지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블랙박스 영상에는 10시 5분부터 10시 10분까지, 자판기 불빛을 받으며 숫자를 세는 내 뒷모습이 한순간의 끊김 없이 찍혀 있었다.
은호의 추정 사망 시간은 10시 10분경. 나에게는 3층으로 올라갈 물리적인 시간이 단 1초도 없었다.
"내 알리바이는 CCTV라는 완벽한 기계가 증명해 주지. 그렇다면 남은 건... 하늘이와 재영이뿐이야." 나는 다음 타깃인 '백재영'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에피소드 5: 재영의 지워진 폴더
재영의 복수심, 그리고 예상치 못한 알리바이 사진.
다음 날 점심시간. 나는 왁자지껄한 급식실 구석에서 밥을 깨작거리고 있는 재영의 식판 앞에 마주 앉았다.
"밥이 넘어가냐, 백재영? 주군이 돌아가셨는데 상복이라도 입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야, 임지현! 너 진짜 말 함부로 할래? 누가 주군이야! 나 진짜 입맛 없어서 이러는 거야."
"솔직해지자. 너, 은호가 네 코딩 대회 출품작 뺏어서 자기 수시 포트폴리오에 넣었을 때... 진짜 죽여버리고 싶었잖아."
재영의 손에서 숟가락이 미끄러져 식판에 요란하게 떨어졌다.
"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건 나랑 은호 둘만 아는..."
"내가 말했지? 나 눈치 빠르다고. 인공지능 알고리즘 대회 대상. 그거 원래 네가 6개월 동안 밤새워서 짠 코드잖아."
재영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급식실 테이블에 엎드렸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 악마 새끼가 내 코드를 통째로 복사해서 가져갔어! 자기는 시간이 없으니까 내가 양보하라고!"
"네가 안 된다고 반항하니까, 너네 아빠 회사 하청 비리 폭로하겠다고 협박했고."
"그 새끼는 죽어 마땅해! 내 6개월의 피땀을, 내 대학을 뺏어갔으니까!"
"그래서? 숨바꼭질할 때 캄캄한 어둠을 틈타서 3층 계단에서 밀어버린 거구나?"
"아니야!! 나 진짜 아니라고! 나 그날 2층 과학실 책상 밑에 계속 숨어있었어!" 재영이 억울함에 목청을 높였다.
"증명할게! 이거 봐! 내가 숨어있다가 너무 심심하고 무서워서, 과학실 인체모형이랑 셀카 찍은 거야!"
나는 재영이 내민 사진의 정보를 확인했다. 조작 없는 원본 파일. 촬영 시간 밤 10시 13분.
"은호의 사망 추정 시간은 10시 10분 전후. 네가 3층에서 은호를 밀고 2층으로 내려와 여유롭게 셀카를 찍었다고?"
"게다가 과학실은 2층 복도 맨 끝이야! 계단에서 제일 멀다고! 내가 뛰어가면 발소리가 다 났을 거야!"
나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재영이의 알리바이는 내 생각보다 견고했다.
"좋아. 사진은 인정해 줄게. 하지만 너도 완전히 결백한 건 아니야. 공범일 수도 있으니까."
'만약 재영이가 아니라면... 남은 건 하늘이 하나뿐이다. 하늘이의 동기는 대체 뭐였을까.' 나는 다음 목적지인 미술실로 걸음을 옮겼다.
에피소드 6: 하늘의 동기, 끊어진 꿈
하늘의 잃어버린 꿈, 그리고 은호에 대한 증오.
방과 후 텅 빈 미술실. 하늘이는 부서진 석고상 파편들 앞에서 자신의 오른손을 멍하니 쓰다듬고 있었다.
"이하늘. 여기서 뭐 해? 조각칼 잡은 지 1년도 넘었으면서."
"어, 지현아... 그냥 예전 생각이 나서. 날씨가 추워지니까 손에 수술한 흉터가 저리네." 하늘이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늘이는 전국구 입시 미술 유망주였다. 특히 투명 와이어와 유리를 이용한 설치미술(조소)의 천재였다.
하지만 고2 겨울, 오른손 인대와 신경이 파열되며 미술 생명이 끝났다. 겉으로는 작업 중의 사고라고 했지만, 나는 그 이면을 알고 있었다.
거대한 투명 와이어 유리 조각상이 산산조각 나며 깨졌다.
"아아... 아아악! 내 작품! 내 미대 입시 포트폴리오!!" 쏟아지는 유리 파편을 맨손으로 막으려다 피투성이가 된 하늘의 절규.
"어머, 하늘아 미안. 내가 지나가다가 사다리를 살짝 쳤나 봐? 근데 너 유리 조각 맨손으로 잡으면 어떡해. 아깝다~"
은호는 너무나도 해맑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즐거워 보였다. 완벽한 고의였다.
"그날 네 작품 망가지고, 유리 파편에 오른손 신경 다 끊어져서 결국 실기 시험 포기했잖아."
"재활해도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가서 결국 붓도, 조각칼도 다 내려놓게 된 거고." 내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하늘의 과거를 헤집었다.
하늘의 손목에 핏줄이 서며 흉터 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임지현. 너 진짜 잔인한 거 알아?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다시 확인받아야 네 속이 시원해?"
"은호가 미웠겠지. 네 꿈, 네 인생, 네 손가락까지 다 박살 냈으니까."
"그날 밤. 네가 3층에서 은호 밀었지?"
"아니라고! 나는 3층 미술실 이젤 뒤에 쥐 죽은 듯이 숨어서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늘이가 짐승처럼 소리쳤다.
"미술실은 은호가 죽은 3층 계단이랑 제일 가까운 교실이야. 네가 뛰어나가서 은호를 밀치고 다시 미술실로 숨는 데 30초면 충분해."
"증거 있어? 내가 은호를 밀었다는 증거가 있냐고!"
"경찰도 못 찾은 증거를 네가 무슨 수로 찾을 건데! 말로만 사람 범인으로 몰지 마!"
하늘의 눈에서 차가운 눈물이 툭 떨어져 미술실 바닥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증거? 찾으면 되지. 내일 밤 자정, 사건 현장이었던 구관 3층으로 모여." 나는 굳게 닫힌 미술실 문을 열고 나섰다. 미술실, 그리고 투명 와이어... 무언가 강력한 직감이 내 뒤통수를 때렸다.
에피소드 7: 계단 손잡이의 패인 자국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결정적 단서.
다음 날 자정. 겨울바람이 매섭게 부는 폐교 구관 건물 앞.
우리는 폴리스 라인 테이프를 밑으로 기어서 넘어 다시 사건 현장으로 잠입했다.
"지현아... 우리 여기 꼭 다시 와야 해? 은호 귀신이라도 나오면 어떡해..." 재영이가 덩치에 안 맞게 내 옷자락을 꽉 쥐고 덜덜 떨었다.
"귀신보다 산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야. 입 다물고 따라와. 은호가 떨어졌던 3층 계단에 해답이 있을 테니까."
하늘이는 아무 말 없이 창백한 얼굴로 내 뒤를 따랐다. 우리는 마침내 3층 계단 참에 도착했다.
바닥의 혈흔은 대충 닦여 있었지만, 폴리스 라인이 어지럽게 감겨 있어 현장의 끔찍함을 더해주었다.
"하늘아. 너 낚싯줄처럼 팽팽한 나일론 와이어가 끊어질 때 나는 소리 들어본 적 있어?" 내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하늘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제자리에 딱 굳어버렸다. "뭐?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데...?"
"내가 1층에서 숫자를 셀 때 말이야. 아흔다섯쯤 셌을 때, 위에서 둔탁하게 쿵! 하고 구르는 소리가 났어."
"그런데 그 둔탁한 소리 직전에, 아주 미세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하나 더 들었거든."
"'팅-!' 하는, 엄청나게 팽팽한 투명 줄이 끊어지거나 튕기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너희도 가까이 와서 이거 봐봐. 나무 손잡이 안쪽에 아주 얇고 깊게 패인 자국이 있지."
재영이가 눈을 비비며 손잡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진짜네? 아주 얇은 실톱으로 긁은 것처럼 홈이 파여 있잖아. 양쪽 다."
"이건 톱으로 그은 게 아니야. 아주 질기고 얇은 선이, 양쪽에서 강한 마찰력으로 당겨지면서 나무를 파고든 자국이지."
"선이라고...? 무슨 선이 나무를 이렇게 파고들어?"
"예를 들면... 미술 전시회에서 무거운 액자나 조각상을 허공에 매달 때 쓰는 고장력 투명 나일론 와이어 같은 거 말이야."
"지, 지현아... 너 지금 무슨 미친 소설을 쓰는 거야?" 하늘이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며 갈라졌다.
"소설이 아니야. 은호는 실수로 헛디뎌서 죽은 게 아니었어."
"누군가 캄캄한 어둠 속에 쳐놓은 완벽하게 '보이지 않는 선'에 발목이 걸려 곤두박질치며 살해당한 거지."
구관 복도의 차가운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는 순간이었다.
에피소드 8: 어둠 속의 알리바이
완벽하게 설계된 살인 트릭의 재구성.
"보이지 않는 선이라고? 발목에 투명 와이어가 걸려서 넘어졌다는 거야?" 재영이가 경악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맞아. 미술용 고장력 나일론 와이어는 수십 킬로그램의 하중도 버티지. 그걸 계단 꼭대기 양쪽 손잡이에 팽팽하게 묶어둔 거야."
"은호는 아마 4층 옥상 쪽으로 숨으려고 뛰어가다가, 정확히 발목 높이에 설치된 그 투명한 선을 전혀 보지 못했을 거야."
"어두운 곳에서 빠른 속도로 뛰어가다 줄에 걸리면, 반사적으로 손을 짚을 새도 없이 머리부터 곤두질치게 되니까."
계단 양쪽 손잡이의 가상의 선.
"말도 안 돼! 그럼 그 살해 도구인 투명 와이어는 누가, 어떻게 회수했는데? 경찰이 현장에 왔을 땐 아무 줄도 없었잖아!" 하늘이가 악을 쓰며 반박했다.
"그게 이 트릭의 핵심이자 가장 소름 돋는 부분이지. 범인은 계단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도 않고,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줄을 회수했어."
"어떻게 그게 가능한데?" 재영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화면이 흑백의 사건 당일 시점으로 전환되며 살인 트릭이 재구성되었다.
"범인은 나일론 와이어 한쪽 끝만 손잡이에 단단히 매듭지어 묶었어."
"그리고 반대쪽 손잡이에는 줄을 묶지 않고, 동그랗게 고리를 만들어서 살짝 걸쳐두기만 한 거지."
"그리고 그 고리에서 이어지는 아주 긴 줄의 끝부분을, 자기가 숨어있는 3층 미술실 문틈 사이까지 길게 연장해서 쥐고 있었던 거야."
나는 손전등 불빛으로 계단 손잡이에서 미술실 문틈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바닥을 천천히 비추었다.
"은호가 전력 질주하며 그 팽팽한 '보이지 않는 선'에 발목이 걸리는 순간!"
은호가 추락하는 끔찍한 실루엣과 함께 소리가 허공을 강타했다.
"사람의 거대한 하중과 속도를 이기지 못한 고리가, 반대쪽 손잡이에서 팅! 하고 튕겨져 풀려나갔겠지."
"그럼 범인은..." 재영이의 두 눈이 공포로 크게 떠졌다.
"미술실 안에 숨어서 낚싯줄을 감아 올리듯, 풀려난 투명 와이어를 잽싸게 자기 쪽으로 당겨서 완벽하게 회수한 거야. 내가 3층에 올라와 불을 켜기 전까지."
미술실 안 이젤 뒤에 숨어 어둠 속에서 미친 듯이 투명 와이어를 감아 쥐는 범인의 그림자.
"이 악랄한 알리바이를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3층 미술실에 숨어 있었고, 누구보다 설치미술용 와이어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 나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에피소드 9: 추리의 완성
하늘의 자백, 그리고 드러난 은호의 잔인함.
"이하늘. 너밖에 없어."
내 입에서 나온 확신에 찬 선고에, 하늘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스르륵 주저앉았다.
"하늘아... 진짜 네가... 네가 은호를 그렇게 끔찍하게 죽인 거야...?" 재영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을 쳤다.
주저앉은 하늘의 얼굴 위로 짙은 어둠이 내리고, 거친 숨소리만 복도에 울렸다.
"증거... 증거 있어? 그깟 소설 같은 추리만으로 나를 살인자로 몰지 마!" 하늘이가 핏발 선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증거. 당연히 있지. 네가 아무리 줄을 완벽하게 당겨서 회수했어도, 현장에 남길 수밖에 없었던 물리적인 흔적."
나는 롱패딩 주머니에서 작은 핀셋을 꺼내, 아까 비추었던 나무 손잡이의 깊게 패인 홈 쪽으로 다가갔다.
손전등 불빛 아래, 나무 홈 사이에 눌어붙어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찌꺼기.
"거대한 하중이 실린 나일론 와이어가 풀려나가면서 나무와 엄청난 속도로 마찰했지."
"그 마찰열 때문에 나일론 와이어가 미세하게 녹아내리며, 이 나무 틈새에 투명한 플라스틱 찌꺼기처럼 눌어붙어 있었어."
"이거 경찰에 넘겨서 성분 분석하면, 네가 미술실 사물함에 쌓아둔 전시용 고장력 와이어와 100%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겠지."
"아..." 하늘의 입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네가 은호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그 조소 작품. 그걸 매달 때 썼던 투명 와이어, 맞지?"
"어떻게... 어떻게 거길 확인할 생각을 했어..." 하늘이가 체념한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늘아... 대체 왜 그랬어... 우리가 아무리 은호를 미워했어도, 끔찍한 살인은 아니잖아!" 재영이가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다.
"은호가... 숨바꼭질하던 날 낮에, 나한테 무슨 끔찍한 짓을 했는지 알아?" 하늘이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은호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의 귓가에 다가왔다.
"수능 끝나고 다들 신나게 웃고 있는데, 은호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더라."
"'이하늘, 미술 학원 애들한테 네가 실수로 유리 깨서 손가락 잘린 썰 풀었더니 다들 안도하더라. 1등 경쟁자 사라졌다고. 넌 그냥 평생 찰흙이나 빚어라' 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성이 끊어졌어. 내 꿈과 손가락을 다 박살 낸 그 악마를, 똑같이 어두운 지옥으로 밀어버리고 싶었어. 그래서 미술실 창고에서 그 와이어를 꺼내온 거야."
에피소드 10: 엔딩: 보이지 않는 선
비극의 끝, 그리고 깨져버린 우정.
하늘의 처절하고 슬픈 자백이 텅 빈 3층 복도를 메웠다. 겨울바람 소리만이 우리의 침묵을 대신했다.
우리 세 사람은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했다. 은호의 악랄함도, 하늘의 끔찍한 살인도 모두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하늘의 얼굴 위로 경찰차의 경광등 불빛이 창문을 통해 비쳤다.
"내가... 밖에서 경찰 불렀어. 이미 건물 밑에 도착했어. 자수하자, 하늘아."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지현아... 고마워. 차라리 이렇게 다 들키니까,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처럼 마음이 너무 편하다."
하늘이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보며 희미하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하늘아, 이하늘!! 바보 같은 기집애야!! 왜 그런 짓을 해서 네 인생을 또 망쳐!!" 재영이가 하늘의 어깨를 잡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무장한 경찰들이 손전등을 켜고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구관 계단을 올라왔다. "거기 학생들! 꼼짝 말고 그 자리에 있어!"
하늘은 스스로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경찰들을 향해 체념한 듯 양손을 내밀었다.
"제가 죽였어요. 며칠 전 계단에서 떨어진 강은호를 죽인 범인, 접니다."
하늘의 가느다란 손목에 은빛 수갑이 채워졌다.
경찰은 하늘에게 미란다 원칙을 고지했고, 나는 증거물로 찾은 나무 홈 사이의 녹아내린 나일론 와이어 찌꺼기 위치를 담당 형사에게 넘겼다.
하늘이 경찰들에게 이끌려 계단을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나와 재영을 돌아보았다.
"지현아, 재영아. 나 때문에 평생 끔찍한 악몽 꾸게 해서 정말 미안해. 잘 지내."
"하늘아... 안 돼, 이하늘!!" 재영이가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경찰차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칠흑 같은 학교 정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옥상 위에 떠 있는 차가운 겨울 달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학교 구관 건물 3층의 열린 창문에서 서늘하고 공허한 바람이 불어왔다.
전교 1등이라는 오만한 권력으로 친구들의 인생을 장난감처럼 짓밟았던 은호. 자신의 부서진 꿈을 친구의 목숨이라는 잔인한 복수로 갚아준 하늘.
그리고 이 끔찍한 비극의 진실을 기어코 파헤치고 만 나. 우리는 모두 은호가 쳐놓은 끔찍한 열등감과 증오의 선에 걸려 넘어졌다.
우리의 숨바꼭질은 끝났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에 걸려 넘어지기 전의, 그 순수했던 열여덟 살의 웃음소리는 영원히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게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