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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ERY

기억 파편의 암호화

작가: Digital Reaper | 매주 연재

에피소드

기억 파편의 암호화 — 작품 소개

작가: Digital Reaper | 매주 연재

#사이버펑크 #스릴러 · 10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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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접속

잊고 싶었던 날짜, 그날의 비밀번호.

내 직업은 '디지털 장의사'다. 죽은 사람들의 하드디스크나 클라우드를 유족의 의뢰에 따라 영구 삭제해 주는 일.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발신자 제한으로 도착한 택배 상자 안에는 흠집투성이의 구형 USB가 하나 들어있었다.

노트북에 USB를 꽂자, 검은색 터미널 창이 스르륵 열렸다. 일반적인 윈도우 폴더가 아니었다.

[System] 손상된 드라이브입니다. 단 하나의 파일이 감지되었습니다.

파일의 확장자는 처음 보는 형태였다. .mp4도, .jpg도 아닌... .mem

Memory(기억)의 약자인가? 직업병이 발동한 나는 마우스로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경고: 최고 수준의 암호화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힌트: 당신이 가장 지우고 싶어 했던 '그날'의 날짜 6자리]

누군가의 질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의뢰를 맡긴 죽은 자의 원한 같은 건가?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내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조심스럽게 숫자를 누르고 있었다. 내가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맹세했던 그날.

[ 2 0 1 8 1 1 ]... Enter.

찰칵. 소름 돋게도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파일이 열렸다. 내 비밀번호를 대체 누가 아는 거지?

암호가 풀리고 나타난 것은 15초짜리 짧은 1인칭 동영상이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은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야산. 촬영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화면 하단에 흙투성이가 된 맨손이 잡혔다. 무언가 무거운 것을 질질 끌어 구덩이로 밀어 넣는 손.

순간, 내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구덩이로 흙을 덮는 그 손목에 채워진 낡은 은색 메탈 시계.

그건 지금 내 왼손목에 채워져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아버지의 유품과 똑같았다.

화면 속의 촬영자가 고개를 숙여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내려다보았다.

"잘 숨겼어. 이제 이 기억은 지워버려." 화면 속에서, '내 목소리'가 속삭였다.

[시스템 알림: 첫 번째 기억 파편 복호화 완료. 다음 파편을 열람하시겠습니까?]

에피소드 2: 사수의 흔적

죽은 자로부터 온 메시지.

영상이 끝나고 노트북 화면은 다시 까만 터미널 창으로 돌아왔다.

내 숨소리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헛것을 본 건가? 아니면 누군가 정교하게 만든 딥페이크(Deepfake) 영상?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쥐고 영상의 메타데이터를 뜯어보았다.

조작된 영상이라면 픽셀의 뭉개짐이나 렌더링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 .mem 파일에는 프레임 데이터가 없었다. 대신 시신경과 뇌파의 전기적 신호를 기록한 '신경망 데이터'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건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아니다. 누군가의 '기억 그 자체'를 추출해 재생한 것이다.

[시스템 알림: 두 번째 기억 파편의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화면에 두 번째 파일이 스스로 나타났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엔터키를 눌렀다.

다시 비 내리는 야산. 1인칭 시점의 나는 방금 흙으로 덮은 구덩이 위에 서 있었다.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 흙 위로 삐져나온 시체의 얼굴이 아주 짧게 화면에 잡혔다.

영상을 일시 정지하고, 그 얼굴을 확대했다. 픽셀이 깨지며 희미한 윤곽이 드러났다.

목덜미에 선명하게 새겨진 뱀 모양의 타투.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를 수가 없는 타투였다.

이 바닥에서 나에게 처음 '디지털 장의사' 일을 가르쳐 준 사수. 서태혁.

내가 2018년 11월에 묻은 시체가 서태혁이라고?

말이 안 된다. 내 기억 속에 서태혁은 1년 전, 암으로 병사했다. 내가 직접 장례식장에서 육개장까지 먹었다.

내 기억이 조작된 건가, 아니면 저 영상이 거짓인가.

그 순간, 책상 위에 올려둔 내 스마트폰이 짧게 울렸다. [카카오톡: 1개의 새로운 메시지]

메시지 알림창에 뜬 발신자의 이름을 본 순간, 내 심장 박동이 멈추는 것 같았다.

[발신자: 서태혁 선배] "보낸 물건은 잘 받았지? 이제 네가 누군지 기억날 때도 됐는데."

에피소드 3: 포맷

시스템 통제권 상실, 밝혀지는 진실.

[발신자: 서태혁 선배] "보낸 물건은 잘 받았지? 이제 네가 누군지 기억날 때도 됐는데."

분명히 죽은 사람이었다. 아니, 내가 직접 산에 묻었거나, 암으로 죽었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서태혁은 지금 나에게 카톡을 보낼 수 없는 상태여야 했다.

[나] "누구야 당신. 어떻게 이 번호를 알고 있지?"

답장은 1초 만에 돌아왔다. 사람이 타이핑할 수 없는 속도.

[서태혁 선배] "네 노트북에 꽂힌 USB 포트를 뽑아. 지금 당장."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가? 황급히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쳤다.

[나] "당신, 날 지켜보고 있어?"

[서태혁 선배] "지켜보는 게 아니야. 접속해 있는 거지. 네가 그 USB를 꽂은 순간부터."

아차. 디지털 장의사라는 놈이 외부에서 온 정체불명의 저장 매체를 오프라인 환경도 아닌 내 메인 노트북에 꽂아버렸다.

황급히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늦어 있었다.

바탕화면의 내 파일들이 실시간으로 파쇄기 기호로 변하며 삭제되고 있었다. 랜섬웨어였다.

[시스템 알림: 시스템 통제권을 상실했습니다. 세 번째 기억 파편을 강제 재생합니다.]

화면이 붉게 점멸하더니, 내가 조작하지도 않았는데 세 번째 영상이 풀스크린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배경은 더 이상 비 내리는 야산이 아니었다. 새하얀 조명이 눈을 찌르는 무균실.

나는 환자복을 입고 수술대 위에 누워있었다. 내 머리에는 수십 개의 전극이 꽂혀 있었다.

수술용 마스크를 쓴 남자가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서태혁이었다.

"미안하다. 살려면, 네 머릿속에서 '그 회사'에 대한 정보는 전부 포맷해야 해."

서태혁이 내 머리맡에 있는 거대한 기계의 스위치를 내렸다.

시야가 암전됨과 동시에, 노트북 화면도 툭, 하고 완전히 꺼져버렸다.

에피소드 4: 백업

안녕하십니까, 백업 본체.

화면이 꺼진 노트북의 검은 모니터 위로, 넋이 나간 내 얼굴이 비쳤다.

내가 내 기억을 강제로 삭제당했다고? 서태혁을 묻은 건 나인데, 나를 수술한 건 서태혁이라고?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파편화된 기억들이 충돌하며 구토감이 밀려왔다.

[지이잉- 지이잉-] 꺼져 있던 노트북이 쿨러를 미친 듯이 돌리며 스스로 재부팅되었다.

OS가 부팅되는 화면이 아니었다. 도스(DOS) 시절에나 볼 법한 투박한 텍스트들이 쏟아져 내렸다.

> Connection established. > Protocol : Lazarus (나사로)

까만 화면 정중앙에 단 한 줄의 문장과, 입력 커서가 깜빡였다.

[질의: 당신의 진짜 이름은 무엇입니까?]

비웃음이 나왔다. 기억이 조작됐든 어쨌든 내 이름 하나 모를까.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 강 도 윤 ]. 엔터.

[응답: Error. 해당 개체는 2018년 11월에 폐기되었습니다.]

폐기?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취급하는 듯한 단어.

[질의: 당신의 진짜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회는 한 번 남았습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만약 여기서 틀리면? 방금 전처럼 내 노트북뿐만 아니라 내 모든 흔적이 포맷될 것 같았다.

생각해라. 내가 잊고 있는 나 자신. 서태혁이 나에게 이 USB를 보낸 이유.

방금 전 세 번째 영상에서 수술대 위에 누워있던 내 환자복 오른쪽 가슴. 거기에 분명히 무언가 적혀 있었다.

기억을 쥐어짜 냈다. 흐릿한 영상 속에서 픽셀처럼 뭉개져 있던 그 단어. 영문과 숫자의 조합.

손끝이 떨렸다. 나는 천천히, 키보드를 하나씩 눌렀다.

[ B a c k u p - 0 3 ]

[응답: 인증 완료. 안녕하십니까, 백업 본체. 당신의 원본이 남긴 마지막 좌표를 전송합니다.]

에피소드 5: 귀환

원본(강도윤)의 기억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화면에 뜬 것은 위도와 경도로 이루어진 GPS 좌표였다.

스마트폰 지도 앱을 켜서 좌표를 검색했다. 서울 외곽, 재개발이 멈춰 방치된 어느 야산의 중턱.

정확히 첫 번째 파일의 영상에서 '나' 혹은 '나의 원본'이 누군가를 묻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창밖은 이미 칠흑 같은 밤이었다. 게다가 영상 속 그날처럼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지 않는 게 맞다. 이 미친 장난질에 놀아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내 발은 이미 현관의 신발을 구겨 신고 있었고, 손은 창고에 처박혀 있던 삽 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진실을 알아야 했다. 2018년에 죽은 강도윤은 누구고, 지금 숨을 쉬고 있는 나는 대체 무엇인지.

좌표가 찍힌 야산에 도착한 것은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진흙탕에 미끄러지며 산을 올랐다. 플래시 불빛에 의존해 잡목림을 헤치고 나아가자, 영상에서 보았던 낯익은 지형이 나타났다.

세 갈래로 갈라진 거대한 소나무. 그 아래, 흙이 부자연스럽게 움푹 파여 있는 공터.

미친 사람처럼 삽질을 시작했다. 비에 젖은 진흙은 끔찍하게 무거웠다.

얼마나 파 내려갔을까. 깡- 하고 삽끝에 단단한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관이 아니었다. 흙을 걷어내자 나타난 것은, 성인 남성 한 명이 거뜬히 들어갈 만한 거대한 티타늄 금고였다.

금고의 전면에는 노트북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키패드가 달려 있었다. 비밀번호는 알고 있다. [201811]

푸쉬익-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문이 열렸다.

플래시를 비추고 내부를 들여다본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금고 안에는 시체 같은 건 없었다.

수십 개의 냉각팬이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서버 랙(Server Rack).

그리고 그 서버의 메인 모니터 화면에는, 빗속에서 삽을 들고 서 있는 지금 내 모습이 실시간 CCTV 화면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시스템 음성] "귀환을 환영합니다, 백업-03. 원본(강도윤)의 기억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에피소드 6: 강제 동기화 : 오버라이드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가짜인가.

"기억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기계음이 울림과 동시에 서버 랙에서 뻗어 나온 푸른빛의 레이저가 내 미간을 정조준했다.

피할 틈도 없었다. 시야가 하얗게 번쩍이는 순간, 내 머릿속으로 끔찍한 이명과 함께 엄청난 양의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것이 아닌 기억들. 아니, '원본 강도윤'의 진짜 기억들이 폭포수처럼 뇌리를 강타했다.

[Memory. 01] 아크로스 코퍼레이션 지하 4층. 삼엄한 보안을 뚫고 들어간 통제구역.

그곳에는 나(강도윤)와 똑같이 생긴 수십 명의 인간들이 배양액이 가득 찬 유리관 속에 잠들어 있었다.

[Memory. 02] "재벌 회장들의 영생을 위한 프로젝트 '나사로'. 우린 미친 짓에 동참한 거야." 서태혁 선배가 피투성이가 된 채 웃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기억과 의식을 데이터로 추출해, 배양된 '백업(클론)' 육체에 이식하는 불법 실험을 하고 있었다.

[Memory. 03] 나와 서태혁은 이 사실을 내부 고발하려 했다. 하지만 회사의 '클리너'들에게 꼬리를 밟혔다.

서태혁은 즉결 처형당했다. 그리고 나는, 다음번 기억 이식 실험의 피험체로 끌려갔다.

기억 추출 과정에서 원본 강도윤의 뇌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의 클론 '백업-03'이 깨어났다. 그게 바로 나였다.

회사는 나를 폐기하는 대신, 기억이 완전히 소거된 채로 일상생활이 가능한지 관찰하기 위해 사회로 방출했다.

'디지털 장의사'라는 내 직업조차, 회사가 내게 부여한 가짜 설정값에 불과했던 것이다.

"크아아악!" 두개골이 쪼개질 듯한 고통에 나는 진흙탕을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가짜인가.

[시스템 알림: 동기화 100% 완료. 바이탈 사인 안정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빗방울이 차갑게 뺨을 때렸다.

시야가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산의 지형, 바람의 습도, 심지어 주변 잡목들의 흔들림까지 숫자로 계산되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원본 강도윤이 특수부대 출신의 사내 보안요원이었다는 사실이 방금 전, 내 근육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든 순간, 서버의 메인 모니터에 떠 있던 내 얼굴이 다른 사람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죽은 서태혁 선배였다.

에피소드 7: 죽은 자의 망(Network)

서버 속 서태혁과의 조우.

"정신이 좀 들어? 백업-03. 아니, 이제 도윤이라고 불러야 하나."

화면 속 서태혁의 얼굴은 픽셀로 이루어진 조악한 그래픽 같았지만, 목소리만큼은 생전의 그것과 똑같았다.

"선배... 이게 다 무슨..."

"시간이 없어, 짧게 설명할게. 그날 처형당하기 직전, 내 의식을 이 낡은 서버에 업로드하는 데 성공했어."

육체는 죽었지만, 의식은 아크로스 코퍼레이션의 메인망을 피해 이 고립된 오프라인 서버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나를 부른 거야?"

"내일 아침, 아크로스 코퍼레이션이 최종 테스트를 끝내고 상용화 발표를 할 거거든. 수많은 전 세계 인사들의 의식이 불법 클론들에게 이식될 거야."

그렇게 되면 세상은 돈으로 영생을 사는 자들의 완벽한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이 서버 안에, 그들의 모든 불법 연구 데이터와 희생자 명단, 그리고 시스템을 파괴할 '킬 스위치'가 들어있어."

서태혁의 얼굴 위로 붉은색 경고등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네가 이 서버를 켜면서, 외부 망과 연결되는 바람에 회사의 추적 시스템에 좌표가 노출됐어."

[System Error : 외부 침입 탐지. 반경 1km 내 열상 반응 접근 중.]

"벌써 클리너들이 산을 오르고 있다. 도윤아, 네가 이 서버를 부수고, 내 의식과 데이터를 네 머릿속에 마저 다운로드해야 해."

"선배까지 내 머리에 넣으라고? 내 뇌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버텨야 해. 안 그러면 우린 오늘 여기서 완전히 삭제되는 거야."

서버 랙 하단에서 두꺼운 신경망 케이블 하나가 뱀처럼 툭, 튀어나왔다.

끝부분에는 살갗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날카로운 티타늄 바늘이 달려 있었다.

"네 목덜미 뒤쪽에 칩이 이식되어 있을 거야. 거기에 꽂아."

빗소리 사이로, 낙엽을 밟는 일정한 간격의 군화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붉은색 레이저 포인터 세 개가 내 가슴팍을 겨냥했다. 시간이 없다. 나는 케이블을 움켜쥐었다.

에피소드 8: 클리너 : 윤제나

긴박한 산속의 액션, 그리고 배신.

"거기서 손 떼. 강도윤."

레이저 포인터 너머, 우비를 뒤집어쓴 무장 병력들이 금고를 포위했다.

가장 선두에 선 여자가 권총의 장전을 마친 채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윤제나.

내 옛 직장 동기.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빛은 살기를 띤 살인 기계의 그것이었다.

"놀랍네. 폐기 처분된 백업 주제에 여기까지 찾아오고."

제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무전기에 대고 속삭였다. "목표 확인. 생포할 필요 없음. 사살 후 서버 회수하겠다."

"제나야, 네가 어떻게... 우리 동기였잖아!"

"동기? 착각하지 마. 내가 입사 때부터 네 감시역이었으니까."

그녀의 총구가 내 미간으로 올라왔다. 방아쇠에 걸린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당겨지는 것이 보였다.

찰나의 순간, 내 머릿속에 동기화된 강도윤의 전투 기억이 본능적으로 육체를 지배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케이블의 티타늄 바늘을 내 뒷목 깊숙이 찔러 넣었다.

뿌득- 뼛조각이 갈리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목덜미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System : 다중 의식 병합(Merge)을 시작합니다.]

"쏴!!" 제나의 비명과 동시에 총성 세 발이 산속의 고요를 찢었다.

타앙- 탕- 탕!

하지만 총알은 내 몸을 뚫지 못했다. 신경망 케이블 통해 서버의 막대한 전력이 내 신경계로 들어왔다.

세상은 느린 슬로우 모션처럼 멈췄고, 날아오는 총알의 궤적이 붉은 실선처럼 시야에 그려졌다.

근육의 한계를 해제한 내 육체가 바닥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1초. 첫 번째 클리너의 턱을 무릎으로 으스러뜨렸다. 2초. 두 번째 클리너의 소총을 빼앗아 개머리판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그리고 3초. 어느새 윤제나의 등 뒤로 돌아간 나는, 그녀의 목에 부러진 삽 자루의 끝을 겨누고 있었다.

에피소드 9: 의식의 병합 (Stock Merge)

쏟아지는 데이터, 초인적인 연산.

"컥...!" 제나의 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뇌혈관은 터질 것처럼 팽창해 있었다. 코와 귀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System : 다운로드 70%... 85%... 99%...]

서태혁의 모든 지식과 아크로스 코퍼레이션의 추악한 데이터가 내 뇌 피질에 완벽하게 각인되었다.

"너... 괴물 자식..." 제나가 목이 졸린 채로 헐떡거렸다.

"아니. 나는 이제 강도윤이자, 서태혁이고, 너희가 죽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집합체야."

[System : 다운로드 완료. 서버 자폭 시퀀스를 가동합니다.]

"폭발한다. 뛰어!" 나는 제나의 뒷덜미를 잡고 금고 밖 진흙탕으로 몸을 던졌다.

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티타늄 금고 안의 서버가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산산조각 난 하드디스크 파편들이 비와 함께 쏟아져 내렸다.

회사가 애타게 찾던 유일한 증거가, 물리적으로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바닥에 엎어진 제나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하... 끝났네. 증거가 다 날아갔어. 넌 이제 평생 도망자로 살아야 해!"

나는 얼굴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제나야. 너희 경영진이 참 문제가 많았지?"

나는 내 뒷목에 꽂혀 있던 케이블을 뽑아 바닥에 던졌다.

"증거는 날아가지 않았어. 지금 이 머릿속에, 엄청난 양의 데이터로 완벽하게 병합(Merge)되어 있으니까."

제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회장한테 전해. 영생 프로젝트는 오늘부로 폐지라고."

나는 얼어붙은 제나를 남겨둔 채, 비 내리는 산등성이를 따라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내일 아침이면, 세상이 뒤집힐 것이다.

에피소드 10: 도파민 충전소의 탄생

진실은 가장 혼란스러운 곳에 숨겨진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났다.

아크로스 코퍼레이션은 예상대로 침묵했다. 그들은 내가 가진 데이터가 언론에 노출될까 봐 함부로 공개 수배조차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주류 언론사나 경찰청에 이 거대한 비리를 섣불리 제보할 수는 없다. 이미 그들의 의식이 권력자들의 머릿속에 이식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뇌리에 저장된 서태혁의 인공지능 자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가장 안전한 은닉처는, 가장 혼란스러운 곳이야.]

맞다. 사람들은 너무 진지하고 완벽한 진실은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음모론이나 자극적인 썰로 포장했을 때 미친 듯이 퍼져나간다.

나는 추적할 수 없는 해외의 무료 호스팅 서버를 빌려, 텍스트와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웹사이트를 하나 만들었다.

서버나 데이터베이스는 필요 없다. 내 머릿속에 있는 끝없는 기밀문서들을 뿌려버리면 그만이니까.

대중의 말초신경을 자극할 이름. '도파민 충전소'.

그곳에 나는 아크로스 코퍼레이션의 비밀들을 삼류 웹소설이나 도시괴담인 것처럼 각색하여 올리기 시작했다.

[단독 입수: 피 묻은 축구공과 상장 폐지의 진실] [어느 디지털 장의사의 기괴한 USB]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철저한 픽션이라고 믿으며 밤을 새워 스크롤을 내렸고, 링크를 퍼 날랐다.

조회수가 100만을 넘어가자, 아크로스 코퍼레이션의 주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픽션 속에 숨겨둔 '진짜 암호화된 좌표와 명단'을 누군가 해독해 낸 것이다.

회사가 사이트를 차단하려 해봤자 소용없다. 이건 껍데기일 뿐, 진짜 데이터는 전 세계 네티즌들의 로컬 스토리지에 저장되어 무한히 증식하고 있으니까.

나는 오늘도 모니터 앞에 앉아 다음 에피소드를 타이핑한다.

어쩌면 지금 당신의 등 뒤에도, 우비를 입은 클리너들이 서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거짓말 같나?

그렇다면 당신이 방금 전까지 무심코 탭하며 넘겨보았던 이 화면들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라.

웹사이트의 글씨가 깨지고, 붉게 변하고, 소리가 들리던 그 모든 효과들.

그건 단순한 에러가 아니라, 내 머릿속 서버가 당신의 브라우저를 통해 구조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는 것을.

[시스템 알림: 당신의 디바이스에 진실이 동기화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새로운 백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