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애의 탈을 쓴 회장님
에피소드
응애의 탈을 쓴 회장님 — 작품 소개
생후 8개월, 나는 인생 2회차 회장님이다.
#코미디 #환생 #성장 · 10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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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자본주의 영아의 우쭈쭈 생존기
생후 8개월, 나는 인생 2회차 회장님이다.
"우쭈쭈쭈! 우리 아들 깼쪄요? 오구오구!"
내 눈앞에 엄마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꽉 차게 다가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된 저 끔찍한 조어법.
나는 생후 8개월 된 지극히 평범한 갓난아기다. 단지, 어른들의 모든 언어와 세상의 이치를 이미 완벽하게 깨우쳤을 뿐이다.
"우리 애기, 맘마 먹을까여? 맘마? 냠냠 맘마!" 엄마가 내 눈앞에서 젖병을 격렬하게 흔들어댔다.
'어머니. 식사 혹은 우유라는 훌륭한 명사가 있는데, 왜 굳이 의미 없는 음절을 두 번이나 반복하시는 겁니까.'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비효율의 극치다.
하지만 내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우부부, 땨땨!"
"어머머! 여보! 방금 얘 맘마 달라고 대답한 거 맞지! 천재인가 봐!"
엄마의 호들갑에 거실에서 뉴스를 보던 아빠가 달려왔다.
아빠는 내 입가에 묻은 침을 닦아주며 세상 다정하게 말했다. "에비! 지지야 지지! 지지 묻었네~"
'지지라니요. 그냥 침출수입니다. 오염 물질을 가리키는 유아어의 한계가 참으로 개탄스럽군요.'
나는 이 한심한 성인 남녀의 재롱을 가소롭다는 듯 무표정하게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의 절대적인 보호와 지원이니까.
나는 방긋 웃으며 짧고 뭉툭한 팔을 뻗어 아빠의 코를 쥐어뜯었다.
"아구구! 아빠 코 잡았쪄! 우리 아들 힘도 세네!" 아빠는 코가 빨개진 채로 실없이 웃었다.
'인간의 알고리즘이란 참으로 단순해. 무해한 외모와 작은 스킨십 하나면 무장해제되니까.'
나는 젖병의 고무 젖꼭지를 씹으며 달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력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진 날. 바로 내일, 민족 대명절인 설날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일 년에 두 번 있는 합법적 자금 조달의 날.
내일의 세뱃돈 수확을 위해, 나는 오늘 밤 '극한의 눈웃음' 프로토콜을 점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에피소드 2: 세뱃돈 수확 알고리즘
이 미소 한 번에 시드머니가 굴러들어 옵니다.
명절 아침. 우리 집 거실은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이고, 우리 조카! 고모가 안아볼까? 까꿍! 까아아꿍!"
고모의 옥타브 높은 까꿍 공세에 내 고막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자본주의의 미소로 화답했다.
'참으십시오, 8개월 차 영아. 이 미소 한 번에 시드머니가 굴러들어 옵니다.'
내 최종 목표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막대한 자본을 모아 우량 기업의 주식을 매집하는 것이다.
그 위대한 여정의 첫걸음이 바로 오늘, 친척들의 지갑을 터는 것.
엄마가 내게 한복을 입혀 거실 한가운데에 앉혀두었다. 나는 재빠르게 거실에 앉은 인간들의 재력 수준을 분석했다.
'타겟 1순위. 최근 회사에서 승진 보너스를 받았다는 큰아버지. 지갑의 두께가 예사롭지 않다.'
나는 큰아버지를 향해 정확히 조준하고, 오늘을 위해 연마한 필살기 '옹알이와 윙크의 콜라보'를 시전했다.
"우땨땨! 압바바!" 나는 두 팔을 벌리고 큰아버지를 향해 기어갔다.
"허허! 요 녀석, 큰아빠를 알아보는구나! 아이고 예뻐라!"
큰아버지는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흰 봉투를 꺼냈다.
'좋아. 최소 10만 원은 가뿐히 넘겠군. 투자 수익률 최고다.'
큰아버지가 봉투에서 꺼내 내 손에 쥐여준 것은... 푸르스름한 지폐 한 장이었다.
'...만 원? 고작 만 원? 장난합니까? 지금 물가 상승률이 얼만데.'
나는 순간 굳어버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내 노동력(애교)의 가치가 고작 만 원에 후려쳐지다니!
나는 큰아버지의 품에서 바르둥거리며, 옆에 앉은 큰어머니의 진주 목걸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에구! 우리 조카가 반짝이는 걸 좋아하네. 여보, 애기 과자 사 먹게 더 줘요~ 만 원이 뭐야."
큰어머니의 핀잔에 큰아버지가 머쓱하게 웃으며 5만 원짜리 노란 지폐 두 장을 더 꺼냈다.
'오늘의 영업 이익 달성률 150%. 성공적이다.'
에피소드 3: 문화센터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
이곳의 에이스는 나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문화센터 '오감 발달 촉감놀이' 수업 날이다.
엄마는 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본인의 외출복을 한껏 차려입은 채 콧노래를 불렀다.
'촉감놀이는 핑계일 뿐. 사실상 어머니들의 사교 모임과 육아템 자랑 대회에 가깝지.'
문화센터 교실에는 나와 비슷한 개월 수의 아기들 여덟 명이 매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참으로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원시적인 생태계군.'
옆에 앉은 아이는 자기 발가락을 빨고 있고, 내 앞의 아이는 허공을 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무지몽매한 영아들과 동급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니,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강사가 들어와 화려한 탬버린을 흔들며 과도하게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친구들~! 오늘은 미역으로 재밌는 놀이를 할 거예여~!"
강사가 삶은 미역을 우리 앞에 한 무더기씩 던져주었다. 다른 아기들은 기겁을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미역. 요오드와 칼슘이 풍부한 해조류. 피부 보습에도 나쁘지 않지.'
나는 울며 도망가는 동기들을 비웃듯, 미역 한 줄기를 우아하게 집어 들어 목에 목도리처럼 둘렀다.
그리고 강사와 눈을 정확히 맞춘 뒤, 자본주의의 정석인 눈웃음을 완벽하게 지어 보였다.
"어머! 어머니, 바름이는 미역을 너무 좋아하네요! 소근육 발달도 엄청 빨라요!"
강사의 극찬이 교실에 울려 퍼지자, 엄마의 어깨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호호호! 우리 바름이가 좀 유별나게 영특하긴 하죠~"
'어머니, 영특한 게 아니라 비위가 좋은 겁니다. 이 끈적이는 해조류를 몸에 두르는 게 얼마나 찝찝한지 아십니까.'
하지만 나는 오늘 엄마의 기분을 완벽하게 맞췄다. 이로써 이번 주 신상 간식(퓨레) 획득은 따놓은 당상이다.
수업이 끝나갈 즈음, 나는 다른 아기들이 울며 남긴 미역까지 끌어모아 전위적인 조각상을 만들고 있었다.
문화센터 생태계 접수 완료. 이곳의 에이스는 나다.
에피소드 4: 미슐랭 쓰리스타 이유식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미각도 돈으로 결정되는 법.
생후 9개월. 드디어 미각의 시대가 열렸다.
분유의 단조로운 맛에서 벗어나, 고형물인 '이유식'을 영접하게 된 것이다.
"자~ 우리 아들, 아~ 하세요! 냠냠!"
엄마가 앙증맞은 실리콘 숟가락에 초록색 진흙 같은 것을 퍼서 내 입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냄새를 맡고 즉시 성분 분석에 들어갔다.
'브로콜리, 청경채, 그리고 쌀가루. 단백질은 전무한 순수 탄수화물과 식이섬유의 조합.'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그래, 장 건강에는 도움이 되겠지.
입안에 퍼지는 끔찍한 무맛. 간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채소의 비린맛이 혀를 맴돌았다.
'어머니, 아무리 나트륨 섭취를 제한해야 하는 영아라지만, 이 맛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수준입니다.'
내가 미간을 심하게 찌푸리며 삼키기를 거부하자, 아빠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비행기 모양 숟가락. 아빠가 입으로 비행기 궤도를 그리며 내 입으로 돌진했다.
"슈우웅~ 브로콜리 비행기 들어갑니다! 아~!"
'저런 유치한 속임수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다니, 성인 남성의 지적 수준이 의심스럽군.'
나는 숟가락을 단호하게 손으로 쳐냈다. 이유식이 아빠의 하얀 셔츠에 명중했다.
"헉! 내 출근복!" 아빠가 당황하며 셔츠를 닦아냈다.
"여보, 애기가 맛이 없나 봐. 어떡하지?" 엄마가 걱정스럽게 냉장고를 뒤적였다.
나는 짧은 팔을 들어 올려 식탁 위에 올려진 특정 식재료를 정확히 가리켰다.
한우 안심 투뿔. 단백질과 마블링의 완벽한 조화.
"어머, 우리 아들 고기 먹고 싶어? 비싼 건 알아가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미각도 돈으로 결정되는 법. 고기를 구우십시오, 어머니.'
에피소드 5: 보행기 면허 시험
길을 비켜라, 영아 레이서가 납신다.
생후 10개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도약, 직립 보행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스스로 걷지 않는다. 무릎 관절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 저들이 나를 안아주지 않을 테니까.'
이동은 남(부모)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이 최고다. 하지만 나만의 프라이빗한 이동 수단이 생겼다.
할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최고급 스포츠카 디자인의 '보행기'.
나는 보행기 시트에 안착하며 양발로 바닥을 움켜쥐었다. '시스템 온. 엔진 가동 준비 완료.'
"우와! 우리 아들 빠방이 탔네? 이리 와봐, 엄마한테!"
엄마가 거실 끝에서 장난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전방 3미터. 장애물 없음. 목표물 확인.'
나는 발끝에 힘을 주고 가볍게 밀었다. 보행기가 바퀴를 굴리며 부드럽게 전진했다.
"어머머! 여보 얘 보행기 타는 거 봐! 방향 전환도 완전 잘해!"
아빠가 카메라를 들고 내 주변을 맴돌며 셔터를 눌러댔다.
'이 정도 코너링은 기본이지. 내 전생이 레이서였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거실 중앙에는 무시무시한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바로 '반려견 두부(말티즈, 5세)'.
두부가 내 앞을 가로막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자칫하면 뺑소니 사고가 날 수 있다.
'경로 재탐색. 좌측으로 30도 틀어서 드리프트.'
나는 발을 교차하며 보행기의 방향을 순식간에 틀었다. 두부의 꼬리털 하나 건드리지 않는 완벽한 회피 기동.
"미친! 여보 방금 봤어? 얘 베스트 드라이버야!" 아빠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나는 거실의 카펫을 지나 식탁 밑까지 완벽한 레이싱을 펼쳤다.
내 발끝에 거실의 평화가 달려있다. 길을 비켜라, 영아 레이서가 납신다.
에피소드 6: 장난감은 사절입니다, 현금으로 주시죠
현금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명절이 지나고, 외할머니가 양손 무겁게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할머니가 우리 똥강아지 주려고 선물 사 왔지~!"
할머니의 '선물'이라는 단어에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과연 현찰일까, 아니면 실물 경제에 바로 투입 가능한 순금 반지일까?'
할머니가 거대한 쇼핑백에서 꺼낸 것은, 내 몸집만 한 뽀로로 오뚝이 인형이었다.
내 기대감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우와! 바름아, 뽀로로다! 뽀통령! 안녕~ 해봐!" 엄마가 신나서 오뚝이를 흔들었다.
'플라스틱 쪼가리. 중고 마켓에 팔아도 만 원을 넘기기 힘든 악성 재고품이군.'
나는 억지웃음조차 지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눈으로 오뚝이를 응시할 뿐이었다.
"애가 낯가리나? 왜 이렇게 안 웃어? 이거 말고 다른 거 줘야겠다."
할머니가 오뚝이를 치우고, 이번에는 건전지를 넣으면 요란하게 돌아가는 불빛 장난감을 꺼냈다.
'할머니, 제 시신경을 파괴하실 작정이십니까. 저런 조잡한 중국산 완구는 제 포트폴리오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는 고개를 획 돌려버리고, 바닥에 깔린 매트만 손톱으로 긁어댔다.
"어머, 우리 바름이 오늘 기분이 안 좋나 봐. 장난감을 다 싫어하네." 할머니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타이밍을 잡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할머니의 지갑.
나는 빛의 속도로 기어가, 지갑 밖으로 반쯤 삐져나온 배추색(5만 원권) 종이를 낚아챘다.
빳빳한 종이의 질감. 완벽한 유동성 자산이다.
나는 5만 원 권을 손에 쥐고 오늘 처음으로 가장 맑고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고! 요 녀석 돈 좋은 건 알아가지고! 그래, 그거 너 해라!" 할머니가 박장대소했다.
'장난감의 감가상각을 고려하면 현금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주주님.'
에피소드 7: 돌잡이 배팅 전략
내 인생의 포트폴리오는 현금 비중 100%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생일, 1년 동안 무사히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는 '돌잔치' 날이 밝았다.
호텔 연회장에는 나를 보기 위해 친척과 지인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불편한 한복을 차려입은 나는 돌상 한가운데에 앉아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돌잡이'. 내 앞에는 여러 물건이 일렬로 놓여 있었다.
"자~ 우리 바름이가 뭘 잡을까요! 판사봉? 청진기? 명주실?" 사회자가 분위기를 띄웠다.
나는 철저한 손익 계산으로 물건들을 스캔했다.
'청진기. 의사가 되면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지만, 초반 펠로우 과정의 노동 강도가 너무 심하다.'
'판사봉. 명예롭지만 워라밸이 엉망이지. 명주실? 오래 사는 것만으론 자본주의에서 승리할 수 없다.'
내 시선은 돌상 맨 우측에 놓인 빳빳한 5만 원권 다발에 꽂혔다.
'역시 현찰이다. 초기 자본금 확보가 미래의 복리를 결정하니까.'
"자! 잡습니다! 셋, 둘, 하나!"
사람들의 숨죽인 시선이 내 손끝으로 모였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돈다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아빠가 눈치 없이 내 손목을 살짝 비틀며 마이크 쪽으로 방향을 유도했다.
"아빠는 바름이가 아이돌이 됐으면 좋겠어! 마이크 잡자, 마이크!"
'아버지, 저를 기획사 노예 계약으로 밀어 넣을 작정이십니까.'
나는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명주실 뭉치를 발로 차버렸다.
명주실이 돌상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나는 두 손으로 돈다발을 꽉 움켜쥐었다.
"와아아아!! 돈 잡았습니다! 나중에 엄청난 부자가 되겠네요!" 사회자가 소리쳤다.
나는 돈다발을 꽉 쥐었다.
나는 돈다발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내 인생의 포트폴리오는 현금 비중 100%다.
에피소드 8: 키즈카페 서열 정리
싸우지 않고 평화를 쟁취하는 법.
돌이 지나자 걷는 속도가 제법 빨라졌다. 그리고 부모님은 나를 '키즈카페'라는 전장으로 내몰았다.
주말 오후, 키즈카페는 흡사 아비규환의 무법지대였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미취학 아동들.
'통제력이라고는 1도 없는 짐승들의 소굴이군. 스트레스 지수가 수직 상승한다.'
거대한 정글짐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엉켜 미끄럼틀을 역주행하고 있었다.
"바름아! 저기 가서 형아들이랑 같이 놀아!" 엄마가 내 등을 떠밀었다.
'어머니, 저기 들어가면 최소 찰과상, 최대 골절입니다. 저는 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나는 미끄럼틀을 단호하게 외면하고, 가장 인적이 드물고 안전한 '편백나무 큐브 룸'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나보다 개월 수가 어린 아기들이 얌전하게 편백 큐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입장하자, 10개월쯤 되어 보이는 아기가 내 앞의 중장비 장난감을 탐내며 기어 왔다.
'어딜 감히 선배의 영역을 침범하느냐.'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입에 물고 있던 공갈 젖꼭지를 손으로 탁 뺀 뒤 녀석을 노려보았다.
나의 차가운 눈빛 제압에, 아기는 흠칫 놀라더니 울먹이며 엄마에게 기어갔다.
"어머, 바름이 친구한테 양보해야지~" 우리 엄마가 당황하며 개입하려 했다.
나는 즉시 공갈 젖꼭지를 다시 물고,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억울한 표정으로 큐브를 만지작거렸다.
'어머니, 정당한 영역 방어 행위였습니다.'
결국 엄마는 "그래, 우리 바름이가 먼저 놀고 있었지~" 라며 나를 두둔했다.
나는 편백나무 룸 한가운데에 누워 나무 향기를 맡으며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밖에선 괴수들이 날뛰고 있지만, 이곳만은 나의 완벽한 성역이다.
키즈카페의 진정한 지배자는, 싸우지 않고 평화를 쟁취하는 법이다.
에피소드 9: 영재 발굴단 회피 기동
영재 교육은 사절입니다.
생후 18개월. 이 시기가 되면 부모들의 헛된 망상이 시작된다.
"여보! 바름이가 오늘 TV에 나오는 사과를 보고 '따따'라고 했어! 이거 천재 아니야?"
'어머니,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지 못하고 따따라고 하는 게 어떻게 천재입니까.'
하지만 부모님의 조기 교육 열풍은 막을 수 없었다. 거실 한쪽 벽면이 온통 낱말 카드와 한글 포스터로 도배되었다.
엄마가 그림 카드를 내 눈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자~ 바름아! 이거 뭐야? 코끼리! 코오~끼리!"
'포유류 장비목 코끼리과의 동물이죠. 상아 밀렵으로 멸종 위기에 처해있고요.'
내 머릿속엔 이미 위키피디아 수준의 정보가 있지만, 밖으로 낼 수 있는 소리는 한정적이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엄마가 카드를 바꾸며 유혹했다.
"이거 맞히면 엄마가 바나나 까까 줄게! 자, 이건 뭘까?"
엄마가 든 카드는 '사자'였다. 간식을 건 거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앞니를 드러내고 힘껏 소리쳤다. "어흐응!"
"맞았어!! 사자 어흥!! 여보, 우리 애 영재발굴단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엄마는 기쁨에 겨워 최고급 바나나 퓨레를 내게 대령했다.
나는 퓨레를 핥아먹으며 다음 카드를 응시했다. 이번엔 '자동차' 그림이었다.
'너무 똑똑하게 굴면 피곤해진다. 조기 영어 유치원이나 학습지 노예로 전락할 수 있어.'
나는 적당히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 뇌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자, 바름아 이건? 부릉부릉 차!"
나는 자동차 그림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외쳤다. "멍멍!!"
"아휴, 아니야 그건 강아지가 아니야~" 실망한 엄마의 반응. 완벽한 수준 조절이다. 영재 교육은 사절입니다.
에피소드 10: 엔딩: 두 살의 빅 픽처
나의 완벽한 포트폴리오.
어느덧 인생 2년 차. 나는 이제 두 발로 제법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말문도 트이기 시작해서, 짧은 단어들을 연결해 나의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엄마, 까까 줘. 마이 줘."
겉보기에는 그저 간식에 집착하는 평범하고 귀여운 아기.
하지만 내 방 장난감 상자 가장 밑바닥에는,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비밀문서가 숨겨져 있다.
바로 내 이름으로 된 '청약 통장'과 '주식 계좌' 내역서.
그동안 명절 세뱃돈, 생일 용돈, 그리고 이가 날 때마다 친척들에게 뜯어낸 치아 축하금까지.
나는 엄마의 스마트폰을 잠금 해제하는 패턴을 외워두었다가, 엄마가 낮잠 잘 때마다 계좌의 잔고를 확인한다.
'투자 원금 500만 원 돌파. 테슬라 1주 매수 시점을 잡아야 할 텐데, 환율이 문제로군.'
기저귀를 차고 주식 그래프를 분석하는 두 살짜리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아들, 거기서 뭐해? 응가해?"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엎어놓고, 그 위에 뽀로로 인형을 덮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맑고 순수한 미소를 장착했다.
"아빵! 놀아줘!"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아빠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고 내 새끼! 아빠가 우리 바름이 장난감 사줄까?"
'아니요, 장난감 말고 제 계좌로 예수금을 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속마음을 꾹 누른 채, 나는 아빠의 볼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조금만 더 이 '귀여운 척'을 유지하면 된다. 유치원에 입학할 때쯤이면 내 자산은 두 배로 불어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아기로 살아남는 법. 그것은 어른들의 방심을 노려 완벽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것이다.
두 살 바름이의 완벽하고 치밀한 빅 픽처는, 내일도 계속된다. 응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