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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의인화 #생존기

저 좀 사가실래요?

공장에서 태어난 아이보리색 캐시미어 니트의 파란만장한 쇼윈도 생존기. 제발 나 좀 데려가요!

에피소드

저 좀 사가실래요? — 작품 소개

공장에서 태어난 아이보리색 캐시미어 니트의 파란만장한 쇼윈도 생존기. 제발 나 좀 데려가요!

#코미디 #의인화 #생존기 · 10개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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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공장 탈출, 그리고 쇼윈도 데뷔

아이보리색 캐시미어 니트의 당찬 포부와 허무한 패배.

나의 첫 기억은 시끄러운 재봉틀 소리와 매캐한 먼지가 가득한 공장이었다.

'드디어 완성됐다! 나는 이번 26년 F/W 시즌을 강타할 아이보리색 캐시미어 니트라고!'

나는 답답한 투명 비닐에 포장된 채 덜컹거리는 화물 트럭에 실렸다. 내 옆에 낑겨있는 회색 니트가 숨막힌다며 투덜거렸다.

'조금만 참아, 친구들! 우리는 곧 화려한 백화점 매장에 걸려 운명의 주인을 만날 테니까!'

"자, 신상품 박스 다 까! 스팀다리미 예열하고 바로바로 걸자!"

직원 언니의 거친 손길에 비닐이 벗겨지고, 뜨거운 스팀 증기가 내 몸의 구겨진 주름을 시원하게 펴주었다.

'캬하, 이거지. 최고급 캐시미어의 결이 살아나는 기분이야. 나 지금 완전 뽀송뽀송해.'

"오, 이 니트 색감 진짜 잘 빠졌네요. 이번 주 메인 디스플레이로 걸까요?"

"그래, 그거 마네킹에 코디해서 맨 앞에 걸어. 반응 좋을 것 같아."

매니저님의 특명이 떨어졌다. 나는 수많은 옷들을 제치고 당당히 매장 정중앙 VMD 존에 서게 되었다.

'봤지? 내가 바로 이 구역의 메인 주인공이다. 오늘 내로 완판 신화를 찍어주지.'

오전 10시 30분. 백화점 개점 음악이 울려 퍼지고, 철제 셔터가 위로 올라갔다.

'왔다, 인간들! 자, 나를 봐! 내 눈부신 아이보리 컬러와 미친 촉감을 느껴보라고!'

"어? 이 니트 예쁘다. 만져봐, 엄청 부드러워."

첫 번째 손님이 내 소매를 스윽 만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핸드크림 향기가 났다.

'좋아, 향기도 합격. 어서 나를 집어 들어! 카드를 꺼내!'

"근데 때 탈 것 같다. 밥 먹다 김치 국물 튀면 끝이잖아? 딴 거 보자."

손님은 내 소매를 툭 놓고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아니, 김치찌개를 왜 나를 입고 먹으려고 해! 앞치마를 해, 앞치마를!!'

나의 첫 번째 유혹은 김치 국물이라는 한국인의 소울푸드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인간들의 선택을 받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해 보였다.

에피소드 2: 인간 관찰 일기: 핏팅룸의 진상들

늘어나고 떨어지고 뒤집히는 피팅룸 수난 시대.

매장에 걸린 지 3일 차. 나는 매일 수십 명의 인간들에게 만져지고, 흔들리고, 들렸다 놔지는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다.

"아, 사이즈가 좀 애매하네. 라지 사이즈 없어요?"

'아저씨, 내 목덜미 잡고 그렇게 털지 마! 나 늘어난단 말이야! 캐시미어라고!'

어떤 사람은 짙은 향수 냄새를 묻히고 가고, 어떤 사람은 축축한 땀 냄새를 남기고 갔다.

"이건 색깔이 내 퍼스널 컬러랑 안 맞네."

손님이 무심하게 옷을 옷걸이에 걸치려다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어, 어? 야! 나 제대로 안 걸렸... 으아아악!'

나는 먼지 구르다니는 매장 바닥에 철푸덕 떨어졌다.

'주워! 나를 바닥에 떨어뜨렸으면 주워야지 인간아! 그냥 가면 어떡해!'

하지만 그 매정한 손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장을 나가버렸다.

"어머, 신상 니트가 왜 바닥에 떨어져 있어!" 다행히 직원 언니가 달려와 나를 구출해 주었다.

오후 4시경, 드디어 누군가 나를 들고 피팅룸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첫 피팅이다! 내 완벽한 핏으로 이 손님의 지갑을 열게 만들겠어.'

"어우, 얼굴에 화장 안 묻게 조심해야지..."

손님이 나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축축하고 답답한 공기가 느껴졌다.

'잠깐, 언니. 머리가... 머리가 너무 크신 거 아니에요?! 내 넥라인 늘어난다아아!!'

"아, 씨. 부해 보이잖아. 아이보리라서 그런가 뚱뚱해 보이네."

'내가 부해 보이게 하는 게 아니라 언니가 어제 야식을 드신 거라고요! 내 탓 하지 마!'

거칠게 벗겨진 나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좌우가 거꾸로 뒤집혔다.

"하아, 별로네. 안 사." 손님은 나를 예쁘게 개켜놓기는커녕, 목부터 팔까지 완전히 뒤집어 깐 채로 피팅룸 의자 구석에 구겨 던져놓고 나가버렸다. 진짜, 성격 드러운 인간들 천지다.

에피소드 3: 바코드 앞의 배신

온라인 할인가에 밀려버린 나의 첫 번째 진짜 손님.

며칠 동안 수많은 진상들에게 시달리며 나의 뽀송하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시즌 오프 매대로 끌려가서 반값 할인 딱지가 붙어버릴 거야... 제발 누가 나 좀 데려가!'

"어? 이 니트 디자인 엄청 예쁘다. 재질도 너무 좋은데?"

나를 집어 든 건 깔끔한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한 여성이었다. 은은한 비누 향이 나는, 아주 매너 좋아 보이는 주인이었다.

"이거 한번 입어봐도 되죠?" 그녀는 나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피팅룸 거울 앞. 나를 감싸는 반짝이는 하트 필터.

'오 마이 갓! 드디어 내 짝을 만났어! 어깨선 딱 떨어지고, 얼굴빛 확 살아나는 거 봐!'

그녀도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든 듯,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거 진짜 예쁘다. 내일 데이트할 때 입으면 딱이겠네. 이걸로 사야지."

'됐다! 드디어 퇴근이다! 나도 이제 예쁜 옷장으로 입양 간다!'

그녀는 나를 곱게 접어서 계산대 카운터로 가져갔다.

"저기요, 이거 결제할게요. 택 안 떼고 그냥 봉투에 담아주세요."

나는 카운터 위에 얌전히 올려진 채 결제를 기다렸다.

"네, 손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이 포스기를 조작하는 사이, 그녀가 갑자기 무언가를 생각난 듯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 잠깐만. 결제하기 전에 품번 좀 검색해 볼까?"

그녀는 내 허리춤에 붙어있는 가격표 텍을 뒤집어, 바코드 밑의 상품 번호를 스마트폰에 빠르게 입력했다.

스마트폰 화면에 '온라인 단독 20% 할인 특가! 무료배송!' 이라는 문구가 번쩍였다.

"대박. 공식 몰에서 사면 2만 원이나 더 싸네? 심지어 오늘 시키면 내일 오잖아."

'뭐? 잠깐만. 누나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2만 원? 내일 온다고?'

"저기요, 죄송한데 저 이거 안 살게요. 그냥 다음에 올게요!" 그녀는 나를 카운터에 매몰차게 버려두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 '야 이 인간아!! 입어본 건 나잖아! 왜 다른 놈을 배송시켜!!' 나의 첫사랑은 스마트폰 바코드 앞에서 잔인하게 박살 났다.

에피소드 4: 마네킹의 삶은 고달프다

시침핀에 찔리고 통유리 햇빛에 익어가는 윈도우 라이프.

카운터에 비참하게 버려진 다음 날 아침. 직원 언니가 나를 집어 들었다.

"어휴, 이 캐시미어 니트 어제 나갔어야 했는데. 다시 마네킹에 입혀서 메인으로 빼자."

'그래! 다시 윈도우 메인 자리로 가는 거야! 여기서 내 진가를 다시 보여주겠어.'

"자, 팔부터 끼우고. 아, 마네킹 팔이 왜 이렇게 뻣뻣해."

'언니! 마네킹 팔을 꺾어야지 내 팔을 당기면 어떡해! 어깨선 늘어나잖아!'

나는 딱딱하고 차가운 플라스틱 몸뚱이 위에 강제로 입혀졌다.

'따끔! 야! 핏 예뻐 보이게 하려고 등 뒤를 핀으로 집어놓는 건 반칙 아니냐!'

숨을 참아야 할 것 같은 팽팽함 속에서, 나의 마네킹 생활이 시작되었다.

"엄마, 저기 저 마네킹 입은 옷 예쁘다. 만져봐도 돼?"

"만져봐. 어우, 부드럽네. 근데 넌 칠칠맞아서 밝은색은 안 돼."

'꼬마야, 네 손에 묻은 그 초코 아이스크림 당장 치워! 내 몸에 묻히면 너네 엄마 지갑 털리는 거야!'

다행히 초코 아이스크림의 참사는 피했지만, 마네킹의 삶은 가혹했다.

'아, 통유리로 햇빛이 직빵으로 들어오네. 나 캐시미어 100%라서 쪄 죽을 것 같아.'

"이거 마네킹이 입은 거 사이즈 뭐예요? 벗겨서 줘 보세요."

오후 3시. 드디어 나를 입어보겠다는 구세주가 나타났다.

'살았다! 당장 이 딱딱한 플라스틱 몸에서 나를 벗겨줘요!'

"아, 고객님 죄송해요. 방금 확인해보니 이 디자인 라지 사이즈는 전국 품절이네요. 마네킹에 있는 건 스몰이에요."

"아 뭐야, 아쉽네. 그냥 갈게요." 구세주가 허무하게 떠나버렸다.

'오늘도 난 선택받지 못했구나. 온몸의 올이 다 풀리는 기분이야.'

캄캄해진 쇼윈도 안에서 꼿꼿하게 서서 밤을 지새우며, 나는 내일은 꼭 누군가의 따뜻한 몸을 감싸 안으리라 다짐했다.

에피소드 5: 환불 원정대의 습격

삼겹살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배신자. 불량품 위기에 처하다.

마네킹 생활 3일 차. 드디어 나를 결제하고 집으로 데려간 손님이 나타났다.

'만세! 드디어 탈출이다! 이제 예쁜 옷걸이에 걸려 아늑한 옷장에 들어갈 수 있겠지?'

'나를 사 간 이 여자, 화장도 예쁘게 하고 옷 입는 센스도 좋던데. 나랑 찰떡궁합일 거야.'

하지만 나의 핑크빛 기대는 다음 날 아침, 다시 백화점 카운터 위에서 박살 나고 말았다.

"저기요. 어제 산 이 니트, 환불 좀 하려고요."

'뭐? 환불? 어제 거울 보면서 그렇게 예쁘다고 난리 쳤으면서 왜!'

"아, 고객님. 제품에 이상이 있나요? 텍은 아직 그대로 붙어있으시네요."

"그냥 집에 가서 다시 입어보니까 저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결제 취소해 주세요."

'거짓말하지 마! 너 어제 나 입고 텍만 안쪽으로 숨긴 채로 외출했잖아!'

"네, 고객님. 옷 상태 확인해 보고 환불 도와드리겠습니다."

'언니! 내 목덜미 냄새를 맡아봐요! 이 여자가 어제 나 입고 삼겹살집 갔다고!'

"고객님, 죄송하지만 옷에서 진한 고기 냄새랑 향수 냄새가 섞여서 나는데요."

"네? 무슨 소리예요! 전 집에서 딱 한 번 입어본 게 다예요!"

'진짜 어이가 없네. 어제 고기 뒤집다가 내 소매에 기름 튈 뻔한 거 내가 얼마나 심장 졸였는데!'

"고객님, 착용 흔적이 있거나 냄새가 배어 있으면 규정상 환불이 불가합니다."

"아니, 팔 때는 친절하더니 환불해 달라니까 사람을 진상 취급하네! 여기 매니저 불러요!"

결국 매니저까지 나와서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진상 손님은 씩씩거리며 결제 취소를 받아냈다.

"어휴, 진짜 이런 사람들 때문에 장사 못 해 먹겠다. 이거 드라이클리닝 다시 보내야 하잖아."

'내 뽀송뽀송했던 아이보리 캐시미어에 삼겹살과 소주 냄새라니. 너무 수치스럽다.'

나는 팔려 간 지 24시간도 안 되어 삼겹살 냄새를 품은 채, 다시 매장 창고로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인간의 이기심은 무섭다.

에피소드 6: 세일의 계절, 붉은 딱지의 공포

시즌 오프. 할인 딱지와 함께 시작된 옷들의 하이에나 서바이벌.

창고에서 드라이클리닝을 마치고 매장으로 돌아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세상에. 벌써 시즌 오프 세일 기간이 다가왔어.'

옷들에게 세일이란 곧 굴욕이자, 가치의 하락을 의미한다. 신상품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매니저님, 이 아이보리 니트도 세일 품목에 들어가나요?"

"어, 그거 지난달 메인 상품이었는데 은근히 재고가 남았네. 30% 할인 텍 붙여서 매대 쪽으로 빼."

'안 돼! 내 몸에 할인 딱지 붙이지 마! 나는 캐시미어 100% 최고급 라인이라고!'

나의 절규를 비웃듯, 직원들은 나를 고급 원목 옷걸이에서 빼내 일반 플라스틱 옷걸이로 옮겼다.

"세일 시작하면 매장 엄청 난장판 될 텐데. 옷들 망가지지 않게 잘 지켜보자."

'인간들이 몰려온다. 눈빛들이 평소랑 달라. 이건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사냥을 하는 거잖아!'

"어머, 이거 30% 세일하네? 색깔 예쁘다!"

"야, 그거 입어봐. 지금 안 사면 사이즈 다 빠져!"

아줌마 두 명이 나를 두고 서로 양쪽 소매를 잡고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아악! 팔! 내 팔 찢어진다! 이거 놔, 이 아줌마들아!'

"제가 먼저 잡았잖아요! 이거 제가 살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내 카트에 먼저 담으려고 했는데!"

직원이 달려와 상황을 말린 뒤에야 나는 겨우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나의 고귀한 캐시미어 결이 완전 걸레짝이 되어버렸어... 살려줘...'

결국 두 아줌마 모두 나를 사지 않고 다른 세일 상품을 찾아 떠나버렸다.

'정상가일 때는 비싸다고 안 사더니, 세일하니까 서로 찢어발기려 하고. 인간들의 심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매대 맨 밑바닥에 파묻힌 채, 깊은 절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피소드 7: 화장품 테러 주의보

페이스 커버 없는 진상의 습격! 지워지지 않는 치명적 오점.

세일 기간은 옷들에게 그야말로 지옥의 서바이벌이다.

'어우, 살았다. 매대 밑에서 깔려 죽을 뻔했네.'

나를 집어 든 건 얼굴에 메이크업을 아주 두껍게 떡칠한 젊은 여성이었다.

"오, 이거 피팅룸 가서 입어봐야지."

그녀는 나를 들고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행동을 시작했다.

'잠깐! 페이스 커버! 화장 안 묻게 쓰는 페이스 커버부터 얼굴에 써야지!'

그녀는 내 절규를 무시한 채, 비좁은 내 목구멍 안으로 자신의 두꺼운 메이크업 얼굴을 억지로 들이밀었다.

'아아아악! 내 목!! 내 새하얀 아이보리 넥라인에 21호 파운데이션이 묻었어!!'

"아, 목이 왜 이렇게 좁아. 머리 다 망가졌네."

'네 머리가 헝클어진 게 문제가 아니라 내 얼굴에 똥칠을 해놨다고 지금!!'

그녀는 거울을 보더니 마음에 안 드는지 나를 다시 거칠게 벗어 던졌다.

'안 돼... 이번엔 립스틱까지... 난 이제 끝났어. 완벽한 하자 상품이 되어버렸어.'

"어? 화장 묻었네. 모른 척하고 그냥 걸어둬야지."

그녀는 나를 피팅룸 구석에 대충 쑤셔 박아놓고 범죄 현장에서 도망쳤다.

잠시 후, 피팅룸을 정리하던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아 미친! 또 화장품 테러 해놨어! 페이스 커버 좀 쓰라니까 진짜 진상들!"

"아, 이거 립스틱 안 지워지는데 어떡하지."

'언니, 물티슈로 그렇게 빡빡 문지르면 캐시미어 보풀 일어난다고요! 아파요!'

'그만 문질러요 언니! 얼룩 지우려다가 내 소중한 캐시미어 살점이 다 뜯겨 나가겠어!'

결국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직원은 한숨을 쉬며 내 텍에 [오염-불량/수선요망] 이라는 끔찍한 딱지를 붙였다. 나는 그렇게 하자 상품으로 전락했다.

에피소드 8: 창고의 패배자들

어둠 속으로 밀려난 불량품들. 재봉틀의 심판대에 오르다.

[오염-불량] 딱지를 단 나는 화려한 매장에서 쫓겨나, 백화점 지하 창고 깊숙한 곳으로 유배되었다.

"이거 오염 심해서 세일 매대에도 못 내놔. 일단 반품 박스에 모아둬."

'이렇게 나의 F/W 시즌이 끝나는 건가. 한 번도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보지 못하고.'

창고 안의 반품 박스에는 나처럼 상처받은 옷들이 가득했다.

"너도 화장품 테러당했냐? 나는 지퍼가 고장 나서 버려졌어." 옆에 있던 검은색 패딩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어떤 아저씨가 입어보다가 겨드랑이를 찢어먹었어." 니트 조끼가 울먹였다.

'우리는 인간들을 돋보이게 해주기 위해 태어났는데, 인간들은 우리를 너무 함부로 대해.'

우리는 박스 안에서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며 공장으로 반품될 날만을 기다렸다.

며칠 뒤, 박스가 열리고 우리는 다시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향했다.

'우린 이제 어디로 가는 걸까? 쓰레기장? 아니면 땡처리 창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내가 태어났던 공장이 아니라, 외곽의 작은 의류 수선 공장이었다.

"자, 반품 들어온 불량품들 다 꺼내. 살릴 수 있는 건 수선해서 아울렛으로 넘긴다."

'아울렛! 그래, 아울렛이라면 다시 인간들을 만날 수 있어! 나를 살려주세요!'

"이 아이보리 니트는 목에 립스틱이 배어서 세탁해도 안 지워지겠네."

수선집 아주머니가 내 목덜미를 살펴보며 혀를 쯧쯧 찼다.

"그럼 어떡해? 그냥 폐기해?"

"아니, 넥라인을 살짝 브이넥으로 파서 오염된 부분을 아예 잘라내 버리지 뭐. 디자인 수정해서 빼면 돼."

'뭐, 뭐라고요? 내 고결한 라운드 넥을 잘라서 브이넥으로 개조한다고?!'

'으아아악! 마취도 없이 바로 목구멍을 찢어발긴다고?! 살려주세요, 아주머니!!'

"자, 디자인 수술 들어간다. 꽉 잡아!" 나의 정체성이 뜯어고쳐지는 뼈아픈 수선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에피소드 9: 아울렛에서의 새로운 시작

할인율 70%, 낯선 브이넥.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운명.

목덜미가 V자로 시원하게 파이는 대수술을 겪은 후, 나는 교외의 대형 프리미엄 아울렛 매장으로 보내졌다.

'라운드 넥일 때는 참 따뜻했는데... 목이 너무 시리다. 그래도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지.'

아울렛은 백화점보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옷을 고르는 사람들의 표정은 훨씬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매니저님, 이 브이넥 니트 아울렛 전용 기획 상품으로 들어온 건가요?"

"어, 그거 이월 상품 수선해서 넘어온 건데 핏 괜찮네. 70% 할인 태그 붙여서 진열해."

'70% 할인... 나의 가치가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갔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야.'

나는 아울렛 매장 한구석 헹거에 조용히 걸려 누군가 나를 꺼내주기만을 기다렸다.

주말이 되자, 가족 단위 손님들이 매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 여기 있어요! 저렴하고 재질 좋은 캐시미어 혼방 니트가 여깄다고요!'

수많은 손길이 나를 스쳐 갔지만, 브이넥이 부담스러운지 다들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후 5시. 지는 노을빛이 아울렛 창문 너머로 들어올 때쯤.

"엄마, 이 니트 어때? 나 내일 첫 출근할 때 입을 이너로 괜찮지 않아?"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드디어 나를 함부로 다루지 않을 진짜 운명이 나타난 걸까?'

"어머, 색깔 참 곱다. 브이넥이라서 목도 길어 보이고 예쁘네. 만져봐, 엄청 부드러워."

그녀는 내 소매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예전 진상 손님들과는 다르게, 옷을 귀하게 여기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래, 나 엄청 부드러워! 내가 바로 네 첫 출근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그 옷이야!'

"70% 할인해서 가격도 딱 내 예산에 맞네. 엄마, 나 이거 살래!"

그녀는 나를 품에 꼭 안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닿는 순간, 그동안 바닥에 구르고 매대에서 찢길 뻔했던 모든 설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드디어... 드디어 나를 진짜 아껴줄 주인을 찾았어.' 아울렛의 70% 할인 딱지가 붙은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내 자존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게 빛나고 있었다.

에피소드 10: 엔딩: 나의 완벽한 옷장

시련 끝에 찾아온 안식처. 내일도 너를 지켜줄게.

나의 운명적인 주인은 나를 소중하게 종이백에 담아 자신의 작은 자취방으로 데려왔다.

'먼지 날리는 백화점 창고나 시끄러운 세일 매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말 아늑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내일 첫 출근이니까 구겨지지 않게 잘 걸어둬야지."

그녀는 나를 싸구려 세탁소 옷걸이가 아닌, 어깨선이 상하지 않는 두툼한 벨벳 옷걸이에 정성껏 걸어주었다.

'아아... 이렇게 대접받아본 게 얼마 만인지. 어깨가 너무 편안하다.'

다음 날 아침, 눈부신 아침 햇살과 함께 그녀가 나를 입었다.

'와, 페이스 커버 없이 입는데도 이렇게 조심스럽게 입어주다니. 매너 최고야.'

"오, 역시 핏 너무 예쁘다. 오늘 화이팅하자!"

그녀는 내 덕분에 얼굴이 더 화사해 보였다. 나는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으며 첫 출근길의 긴장감을 함께 나누었다.

사무실에서도 그녀는 커피를 마실 때마다 내 소매에 튈까 봐 조심했고, 밥을 먹을 때는 꼭 앞치마를 둘렀다.

'이런 주인을 만나려고 내가 그 모진 시련을 견뎌냈나 봐. 김치 국물의 위협에서 완벽하게 안전해.'

'치열한 바깥세상에서 오염 하나 없이 그녀의 완벽한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돌아온, 세상에서 가장 상쾌한 퇴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나에게 은은한 비누 향이 나는 탈취제를 뿌려 베란다에 바람을 쐬어주었다.

"오늘 하루 고생했어, 예쁜 니트야. 덕분에 첫날 잘 넘겼네."

'너도 고생했어, 주인님. 내일도 내가 예쁘게 지켜줄게.'

바람을 쐰 후, 나는 그녀의 깔끔한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바로 내가 평생 뼈를 묻을, 아니 올을 묻을 완벽한 안식처구나.'

옷장 안에는 나처럼 깨끗하게 관리된 블라우스와 코트들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신입이구나. 우리 주인님 성격 진짜 좋으니까 걱정 마."

쇼윈도의 화려한 메인 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수선 공장까지 거쳐온 나의 파란만장한 생존기. 마침내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나의 완벽한 옷장'에 정착했다. 내일도 출근 준비 완료다!